마지막 꿈을 꾸고 털어버리다

 

얼마 전 친구가 점심 멤버를 소집하길래 대뜸 손을 들었다. 약속 장소로 나가면서도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애인 사귄지 한달반도 안된 친구인데, 날 좋은 휴일날 데이트 약속이 없다는 사실이 맘에 걸렸다. 아니나 다를까. 밥을 먹고있는데 그 사람과 헤어졌노라 말한다. 토닥토닥 해주면서, 냉정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잘했다고 격려했다. 상대방 마음이 급변한 모양인데, 그런 사람을 붙잡는다해도 좋은 결말이 날것 같지는 않았다. 마음이 무척 안쓰러웠던 것은 그 사람이 선택한 이별 방식이었다. 우리 이런식이면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해놓고 잠수를 탄채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 모양이다. 연애는 쌍방의 문제니 친구 말만 듣고 판단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상황만 봐서는 상대방 남자(놈)이 굉장히 몰염치하다 여겨졌다. 연락두절 처럼 기막히고 열 받는 일이 또 없다. 상황은 달랐어도 일찍이 비슷한 일을 경험해봤다. 나는 롱디였고, 애인이 미국에 가고서도 반년간은 꾸준히 연락을 했으므로 연애전선 이상 무라고 여겼다.

 

 

아마도 돌이켜보니,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나뿐이었던 것 같다. 상대방은 연락의 빈도를 점점 줄였고, 시간을 줄였고, 그러다가 어느날 고여있던 물이 증발하듯 후루룩 사라졌다. '오빠 운전 조심해' 라는 평범한 대화를 끝으로 다시는 연락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 내 심정이 어땠냐 하면, 초록 재와 매운 재로 폭삭 주저앉은 서정주 시인의 <신부> 같은 마음이었다. 너무 당황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더 기막힌 사실은 이대로 이별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3개월이나 더 기다렸다는 거다. 8년 알아온 사람이었고 1년을 사귀었다. 반듯한 성품이라고 생각했고, 무슨 일이든 정직하고 합리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으로부터 별안간 아무 설명도 듣지 못한채로 '절연' 을 당해버렸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사고라도 나서 죽은게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그런데 미국과 한국 카톡이 살아있는걸 보면 그건 아닌것 같더라.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등장하는 악몽에 주기적으로 시달렸다.

 

 

 

꿈을 통해 몇번이나 모욕받고, 상처받고, 쓰러졌다. 꿈 속에서 나는 다양한 상황의 주인공이었고, 그 사람의 변명을 들어주는 사람이었고, 그리고 또 멍청하게도 아직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람이었다. 꿈에서 깨어나서 내용을 복기해보면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관찰할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찾아볼 수 있다. 찾아갈 수 있다. 집도 알고. 부모님의 근무처도 알고. 그 사람의 학교도 알고있다. 한국사회에서 그깟 다리 건너는 일이 뭐 어렵겠는가. 궁금했다. 참을 수 없이 궁금해서 도대체 그 사람의 저의가 뭐였는지 찾아서 붙잡고 흔들고 괘씸하다고 소리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꿈이 계속될수록 확고해지는건 바꿀 수 없는 결말, 질척질척하게 보이는 내 자신 뿐이었다. 그래서 그냥,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로 그 마음을 방치했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아물겠거니 생각했고, 연애 쪽의 신경을 꺼두었다. 좋은 사람이 보여도 그러려니 했다. 내가 나서서 손에 넣은 것들은 결국 다 망가졌으니까.

 

 

손만 잡고 있어도 힘이 나고, 품에 안아보면 말할 수 없이 달콤해지고, 언제나 내편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든든하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도 깊은 이야기도 나누면서, 오늘보다 내일 더 나아지는 사람으로 서로를 고취시키는 애인을 만드는 것. 그런 연애의 즐거움, 을 잃어버렸다. 첫번째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나서야 그가 세 다리를 걸쳐왔단걸 알아차렸다. 육개월만에 납득했으며, 내 자신의 매력이 부족했고 예의없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두번째 남자친구랑은 정말로 잘 사귀었었고, 말 그대로 성격이 안 맞아서 헤어졌지만, 99퍼센트가 아주 행복하고 좋은 기억들로 치장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남자친구는 아직도 그 심정을 잘 모르겠다. 이 사람을 생각하면, 플래시가 번쩍 터지는 것처럼 모든 추억들이 하얀색으로 번쩍 점멸한다. 왜 그랬을까. 그 사람은 왜 그래야 했을까. 이런 연애를 하고보니, 사람을 백프로 믿거나 의지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마음 한구석으로 도망칠 준비를 시작했다.

 

 

앙금이 생긴다. 마음이 가라앉는다. 원나잇? 나쁘지 않지. 목적이 확실하고 솔직하잖아. 돈 보고 사귀는 것? 둘이 합의만 된다면야. 불륜?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이런 헤어짐 만큼은 이해를 못한다. 남자들은 헤어질 때 왜 연락을 끊는걸까. 왜 분명히 헤어지자고 말을 못할까. 친구 한명은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서야' 라는 대답을 내놓았는데 설마 정말로 그런 이유라면 그 사람의 이기심을 더더욱 납득할 수 없다. 한참 전에 지나간 일인데도 떠올릴 때마다 속이 쓰리니 이상한 일이다. 그 사람이랑 같이 마셨던 칵테일은 평생 못 마실것 같지만, 그래도 그 사람 생각이 날 때는 술을 마시러 간다. 엊그제는 지인 분이 인연이라는게 진짜 있는가 보다고, 자신이 두달 만에 '첫눈에 반하지도 않은 사람' 과 결혼한 썰을 푸셨다. 우연이 이뤄준 묘한 조합이 썩 마음에 든다면서 결혼생활을 자랑하셨다.

 

 

그래서 나는 슬쩍 아직도 궁금해 하고있는 '사라진 남자친구' 에 대해 털어놨다. 지인 분은 이렇게 해석해주셨다. 그 분은 OO씨를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고 아마 결혼도 생각했을거에요. 그런데 어떤 일로든 마음이 달라져서 헤어짐을 생각하게 된거죠. 그래서 도망간 거에요. 아마 OO씨의 비난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었겠지요. 시간이 지나면 OO씨가 어떤 식으로든 이해해줄거라고 생각했을 테고요. 당장 감당할 자신이 없으니까 그대로 줄끊고 사라진거에요.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봐서 알거든요. 정말 좋아하고 결혼이야기 나온 사람이 있었는데 미묘한 부분이 아니다 싶었어요. 덜컥 겁이 났어요.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어서 도망쳤어요. 근데 그거 알아요? OO씨는 언젠가 그 사람을 잊겠지만, 그 사람은 OO씨를 평생 못잊을 거라는거.

 

 

그런데 아마도 이 이야기가 무의식의 뭔가를 강력하게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날 밤 꿈에 그 사람이 나타났다. 길을 가다가 정말로 우연하게 마주쳤고, 그 옆에는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좋은 분위기의 여자가 있었다. 그 사람한테 가서 아는 척을 하고, 놀란 눈의 그 사람 뺨을 한대 올려붙였다. 그에게 내가 얼마나 당황했고 힘들었고 화가 났었는지 윽박질렀다. 옆에서 여자친구가 참견할라치면 '넌 잠시 빠져있어' 라는 식으로 일축하고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피하지 않고 묵묵히 그 비난을 들었다. 내가 힘이 빠질 때까지 계속 듣고있다가, 미안하다고 입을 뗐다.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밥을 사라고 쫑알거려 셋이서(?) 밥을 먹으러 갔다. 그의 새 여자친구가 굉장히 사랑스럽고 애교있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대략 화해하는 형태가 된 뒤 깨버렸다. 얼마나 진을 썼는지 이부자리가 땀과 눈물로 축축해졌더라. 동시에 깨달았다. 이 사람이 나오는 꿈은 이걸로 마지막이구나. 나는 인제 다른 사람을 찾아갈 수 있겠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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