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양말을 찾아서 떠난 모험


대학에 들어간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다. 친하게 지내던 오라버니가 하루는 억지로 가루약 삼키는 표정을 짓더니 '넌 패션 센스는 나쁘지 않은것 같은데 양말이.. 왜.. 그 모양이냐'. 기억을 더듬어보건대 그날 나는 까만 목폴라에 로브 스타일로 치렁치렁한 잿빛 니트, 까만 진에 소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지적받은 양말은 아가일 패턴이 들어간 연분홍색이었다. 새내기치고 원숙한 차림새긴 했지만 흠 잡힐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이만하면 영국스타일이라고 박박 우겼더니 타워브릿지를 보기는 했느냐며 무시를 당했다.


위트는 이렇게 담아야지


타워브릿지 따위, 비 내리는 영동교랑 다를게 뭐냐고 툴툴대며, 그렇게 주장하는 오라버니 양말을 흘겨봤는데 아뿔싸. 케로로 중사님이 떡하니 그려져 있는게 아닌가. '그럼 캐릭터 양말을 신고 다니라는거냐' 고 물었더니, '당연하지. 양말엔 이런 위트가 담겨있어야지!' 라고 윽박질렀다. 한참 캐쥬얼 패션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구태여 클래식 양말의 A to Z 를 이해시키고 싶지않아서 씨익 웃고 넘어가 버렸다. 요즘도 아가일 패턴의 양말을 신다보면 그 오라버니가 떠오르고, 그토록 확고하던 '캐릭터 양말 위트설' 이 건재한지 한번쯤 묻고싶다.


살갗을 완벽하게 커버하는 길이의 한국양말은 드물다


그렇다. 오늘은 양말 이야기를 꺼낼 참이다. 발단은 이렇다. 남자친구가 반니로부터 정장이 완성됐다는 연락을 받고 찾아가던 중에, 근처에서 일하고 있는 내게 보여줄 생각이 든 것이다. 나야 뛸듯이 기뻐하며 카페로 모셔갔는데,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하던 도중 '양말 사야겠네' 라고 중얼거리는 게다. 바지 기장을 산뜻하게 잡은 채로 깍지다리를 했더니, 종아리의 맨살이 살풋 드러난 상황이다. 무릇 복장이 편해야 만사가 형통한 법. 하루 16시간 이상씩 정장을 입는 직종에서, 발과 신발을 이어주는 양말은 어느때보다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거늘.



그리하여 내맘대로 깜짝 양말선물을 기획하기에 이른다. 우선 남자친구가 보유주인 구두를 확인하고, 정장 색을 눈여겨 두었다. 본래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은근슬쩍 물어본 다음, 인터넷으로 훑으며 괜찮아 보이는 브랜드를 추려냈다. 이후 복식을 더 잘 아는 분들을 붙잡고 '이 브랜드들 중 어떤 것이 괜찮을까요' 문의까지 드렸다. 그 중 한분은 (생판 면이 없는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몹시 세세한 구석까지 도움을 주셨다. 그럼에도 온라인으로는 한계를 느껴서, 소공동 인근 백화점으로 출격해 직접 눈과 손으로 더듬어보며 선택지를 좁혔다.


에드워드 맥스의 클래식 닷 그레이


처음부터 한 브랜드로만 사버리면 실패할까봐, 되도록 다양한 브랜드의 양말을 구매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최종 후보가 된 다섯 브랜드. 우선 에드워드 맥스빅터 앤 알버트 는 거의 비등한 품질이었다. 에드워드 쪽이 더 비싼데 이유는 잘 모르겠다. 포장도 마감도 빅터 쪽이 우위라고 생각하는데 어쨌든 가격이 그렇게 책정되어 있다. 에드워드에서는 실켓사로 만들어진 클래식 라인을 골랐다. 신축성이 꽤 있으나, 밴딩 부분의 끝처리는 아쉬운 편이다. 차콜그레이 색감에 밝고 잘잘한 회색 닷의 조화가 점잖고 세련되게 보인다.


빅터 앤 알버트

에첼


빅터 앤 알버트에서는 RIB 스타일의 검정과 갈색을 구매했다. 골이 파여있는 모양새가 갈비뼈를 닮아서 RIB 인가보다. 실 자체는 부드러우나 쫀쫀하게 직조했다. 뜨개질로 말하자면 '변형 고무뜨기' 인데, 그래서인지 실굵기에 비해 면 두께가 보통보다 조금 도톰한 편이다. 광택이 자르르 흘러서 적당히 고급스러워 보인다. 에첼 에서는 퍼펙트 핏 빈티지 네이비 색상을 골랐다. 발등과 발가락 이음매에 밴딩처리를 다르게 해서 쉽게 밀리지 않도록 만들었다. 다른 양말보다 폭이 넉넉한 편이라 밴딩만 무너지지 않으면 편하게 신을 수 있어 보인다.


빅터 앤 알버트


탄포포 에서는 무지 솔리드 립 타입을 골랐다. 원래는 네이비를 살 생각이 없었는데, 찐남색과 보라를 오가는 미묘한 색감이 너무 마음에 들어 이걸로 골라버렸다. 면사 99% 에 엘라스틴 1% 을 썼는데, 신축성이 약간은 존재한다. 에첼보다는 더 타이트하다. 뒷꿈치를 한번 더 튼튼하게 처리했다. 복숭아뼈 잡아주는 것과 직조 모양새를 보면 '기술' 로 승부하는 양말임을 알게된다. 예상밖으로 굉장히 만족한 양말이었다. 마지막은 라온인데 컬러가 생각하는 것보다 너무 밝았다. 면 자체도 가격 대비 좋은 편이 아니라 다시 구매할 맘이 사라졌다.



이렇게 하나하나 늘어가는 양말들을 뿌듯한 맘으로 바라보며, 어느날 '짠' 하고 의기양양하게 보여주었을 때 놀라는 남자친구의 얼굴을 감상하는게 당초의 계획이었다. 헌데 그 전에 남자친구가 양말을 사러간다고 말하길래, 결국 이 상황을 실토해야만 했다. 내가 고른 양말을 순순히 받아들여준다면 유혈사태없이 (?) 니탄, 팔케, 아네피그라프, 폴 스미스의 세계로 인도할 예정이다. 한달 정도 후에 어떤 양말에 손이 제일 많이 갔는지 물어보고, 향후 구매라인업을 보완해나갈 예정이다. 오랜만에 남자 복식 공부라 신났다. 다음은 셔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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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와 정말 엄청나게 공부하셨네요!!
      양말 하나를 사더라도 이렇게 공부를 하고 딱 맘에 들만한 선물만 골라서 해주는 여친이 있다니
      남자친구분은 좋으시겠어요. ㅎㅎ

    • 다른 분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삭스온리라는 블로그 운영하시는 분인데, 대뜸 양말에 대해 이것저것 여쭈었는데 친절하게 대응해주셨어요. 이왕지사 선물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해주자는게 지론인데, 남자친구가 이걸 맘에 들어해줄지는 잘 모르죠 ^^ 저야 개인적으로 복식공부하는 재미가 있으니 신납니다. 슬슬 셔츠랑, 정장 쪽으로 넘어가야죠.

      네이버에 달아주신 댓글은 잘 보았습니다. 아직 본격적으로 나설 부분은 아니라 (필요하다고 할 때 이때다 하고 실력발휘하는 쪽을 좋아합니다) 조용히 이것저것 공부하고 있습니다. 에스타도도 좋고, 사르토리아 준도 좋습니다만, 전자 쪽이 더 나을것 같아요. 사르토리아 준은 좀 편안한 소재에 캐쥬얼까지 소화 가능한 정장 느낌이 나더라고요. 물론 패턴과 옷감에 따라 달라질 문제긴 하지만, 나폴레탄 수트를 만드는 곳은 특유의 '어깨선이 나긋나긋 동그스름하게 떨어지는' 편안함이 있더라고요. 남자친구가 있는 업계가 보수적이고 클래식한데, 이런 이미지를 원하는지는 조금 얘기해볼 필요가 있을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레리치보다 비앤테일러를 좋아합니다만, 에스타도도 좋아질것 같습니다. 제 생각엔 남자친구 체형을 고려할 때, 더블브레스트가 굉장히 잘 받을것 같거든요. 소위 말하는 갑빠 (허접한 단어 사용 죄송합니다 ㅎㅎ) 가 있는 체형이라, 라펠 좀 도톰하게 잡아주면서 들어가면 아주 멋있을것 같은데....에에.....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죠. 굳이 비스포크를 할 필요 없을것 같기도 하고, 일단은 좀 더 천천히 알아보겠습니다. 정장들이 너무 예뻐서, 여자도 정장 입고 다녔으면 좋겠어요, 흑흑. 직장 들어가면 유니폼처럼 쫙다 빼버릴겁니다 ㅜㅜ

      + 신발은 고민입니다. 에코, 제옥스, 바이네르 정도를 봤는데, 역시 예쁨과 편안함은 공존하기 힘들죠. 특히나 신발은 저녁 때 발 부었을때 찾아가 신어봐야 아는 문제라서 고민 중입니다. 아참. 남자친구 신발 보러갔다가 제걸 사버렸다는게 함정 (..)

    • 네이버 카페에 재미있는 질문을 올리셨길래 구독을 눌렀다가 양말 게시물을 보고는 블로그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글 잘 읽었어요.

    • 아하 ㅎㅎ 이게 구독이 되는건지는 잘 몰랐습니다. 여기는 복식 이야기보다는 다른 이야기가 많을텐데 어쨌든 잘 부탁드릴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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