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yard :: 몰리에르를 들여오기까지


평소 살갑게 구는 성격이 아닌데, 뜬금없이 선물하는 일을 좋아한다. 상대방의 환심을 사거나 엄청난 감사를 받을만큼 뻑쩍지근한 선물은 아니다. 서로간 부담스럽지 않은 선이라 상대방이 받고나서 '어마, 이게 뭐야? ' 정도로 기분좋게 여기고 넘어갈 딱 그 정도의 물건이다. 혹여라도 '와, 정말 센스있네, 고마워' 라는 대답이라도 들을라치면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변태에게 먹이를 주지 맙시다.  물론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의 선물은 다분히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된다. 선물받는 이의 만족보다는, 나의 즐거움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물건을 구매하는 행위, 즉 쇼핑을 즐기고 싶어서 선물을 하는것에 가깝다. 내게 필요없는 물건을 사들이는게 아니라, 남을 위해 산다고 하면 명분도 서고 즐겁기도 하고 일석이조 아니겠느냐 말이다. 상대방 취향을 고려하지만, 결단의 순간이 오면 결국 '남 취향' 보다 '내 마음' 에 드는 물건을 사는게 그 증거다. 그러고선 상대방이 나의 취향과 선택에 공감해주길 간절히 바란다. 하루는 남자친구 생일 선물을 준비하게 됐다. 우선 적정예산부터 고민했다. 남자친구는 데이트 비용을 모두 자신이 책임지는 스타일로 주로 외식비를 지출한다.


선물 대신 선물옵션 굳


남자친구 지갑이 걱정되길래 의논했더니, 정 그러면 아낀 데이트 비용을 모았다가 생일 선물에 보태라고 지도 편달을 받았다. 애초에 뭔가를 찔끔찔끔 모으는 성격이 못 되기에, 생일이 다가오기 3달 전 내가 생각한 예산안만큼을 다른 통장으로 옮겼다. 좀 이색적으로 해볼까 싶어, 마음에 드는 주식을 고르라고 한 다음 세 달 후에 그 주식을 양도해주면 어떻겠느냐 했는데, 거절당했다. 그래서 그냥 목록 작성에 들어갔다. 가장 사주고 싶었던 물품은 시계였는데, 몸값이 비싸니 일백프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포기하겠다는 각오를 다져놓았다.


타임마스터는 용두와 인덱스가 특이해서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모델.


스틸 시계는 있으니, 그와 반대로 드레스 워치가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날로그 시계는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지만, 무시하고 내 취향을 확 반영해버리기로 (..) 그러다가 크로노스위스의 퍼시픽과 타임마스터가 상당히 할인된 가격으로 나온 것을 발견했는데, 예산을 상회하길래 고민하는 사이 놓치고 말았다. 결국 시계에서 승부를 보지 못한 채로, 의복류를 거들떠보기 시작한다. 애용하던 해외 사이트의 Big sale 시즌이 시작된 탓도 있다. 예산의 두배를 넘어서는 옷들까지 방어범위 안에 들어오길래 무척 신나는 기분으로 골랐다. 


잘 입으면 고급지고, 잘못 입으면 러시아 국경수비대가 되는 스타일


이변이 없다면 회사에 입고다닐테니, 그 점을 감안해서 무난하고 점잖은 솔리드 타입 위주의 디자인을 살폈다. 랑방의 카멜색 캐시미어 코트, 아르마니의 차이나 칼라 스타일 코트, 생 로랑과 프라다의 심플한 블랙 코트가 후보에 올랐다. 다만, 그 와중에 남자친구를 슬쩍 떠보니 옷은 반드시 매장에서 입어보고 산단다. 미리 주문하는 일이 불가능해지자 이쪽도 포기해버렸다. 맞춤을 해주는 동복 정장을 고려한 적도 있다. 다만 두가지 문제에 부딪혔다. 맞추기 위해 샵을 두번 이상 방문해야하고, 완성품을 받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것.



가격대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는 점. 사실 정장을 맞춘다면 당연히 '내' 즐거움도 배가된다. 매주 쫄랑쫄랑 따라가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할테니. 다만 깜짝 선물이라는 즐거움은 포기해야 한다. 주위에서도 왠만하면 잡화류가 안전하다는 충고를 자꾸 건네기에, 마지막으로 카테고리를 바꿔버렸다. 그래서 도대체 뭘 골랐냐면, 지갑이다. 남자친구의 원래 지갑은 비둘기색의 보테가 반지갑이었다. 함께한 세월만큼 손에 착 감기는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날, 지갑에 관한 중대한 정보를 얻었다. 예전 여자친구가 선물한 거라고 (..)



몰랐다면 상관 없었을 테지만, 알고도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 예전 지갑보다 더 좋은 것을 맞추려고 고르다보니 브랜드 선택지가 빠르게 줄어 들었다. 여기에 별로라고 생각하는 브랜드 몇 개를 제해 버렸더니, 이름만 들어도 간 떨리는 콜롬보, 고야드, 브리오니, 에르메스가 남았다. 최고라는건 알지만 브리오니와 에르메스는 펀칭이나 엠보싱 약간이 들어간 수수한 디자인이라 아쉬웠다. 결국 콜롬보와 고야드 둘까지 추려놓고, 직접 매장을 방문했다. 콜롬보와 고야드 매장이 동시에 입점해 있는 백화점은 서울에 단 두 곳 뿐이다. 


압구정 갤러리아와 현대 무역센터점. 갤러리아 쪽이 훨씬 싹싹한 응대를 하기에 이쪽으로 찾아가, 콜롬보 매장을 방문했다. 염두했던 악어가죽 반지갑은 예상보다 몹시 여리고 얄팍했다. 악어백의 경우 적당히 도톰하길래 지갑도 마찬가지일 줄 알았는데, 두께가 머니클립저리가라일 정도로 얄쌍하다. 떨리는 눈빛을 감추고 마지막 보루인 고야드로 걸음을 옮겼다. PVC 소재답게 외관은 튼튼했으며 적절히 고급스러웠고 슬롯 개수도 넉넉했다. 문제라면 내가 본 모델이 매장에 들어와있지 않아서 입고까지 무한정 기다려야 된단다 (..)


오히려 한국에서 더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는게 함은정


여기서 주저앉게 되는건가, 머리를 감싸쥐고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대학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 녀석이 파리에 다녀온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너 혹시 고야드 매장 근처에 갈 일 없느냐고 살살 꾀었더니 흔쾌히 대행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 스페셜 컬러인 네이비와 그레이를 두고 한참 고민했는데, 결국 고른건 검정과 갈색과 하얀색이 섞여있는 T1 컬러다. 그레이의 경우 기존의 비둘기 색 지갑이랑 워낙 비슷한 느낌이라 새롭게 바꾼다는 느낌이 덜할 것 같았고, 네이비의 경우 희소한 대신 가벼운 느낌이라, 남자친구가 꺼려할 것 같았다.


마카쥬를 고르면 한화로 15-20 만원 정도가 추가된다


인고의 시간을 거친 뒤 친구로부터 지갑을 받아들었는데, 아뿔싸. 예상보다 사이즈가 훨씬 더 크다. 평소 남자친구가 지갑을 손에 들고 다니는건 알았지만, 회사갈 때는 당연히 가방에 넣고 다닐 줄 알았다. 알고보니 그간 안주머니를 애용해 왔다고 (..) 정장 상의에 안 들어갈까봐 좌불안석이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선물한 다음 체크해보니 아슬아슬하게 safe 라서 안심했다. 물론 가장 좋았던건 남자친구가 지갑을 맘에 들어했다는 것! 주위 지인들도 지갑 센스를 칭찬했다길래 더더욱 신났다. 내년 선물을 뭘로 할지 벌써부터 고민된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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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처자분이신 듯 한데, 아재개그 쩌는군요. "선물 대신 선물옵션"이라니!! 아무나 할 수 없는 건데!!
      필력에서 내공이 느껴집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 그냥 개그인데 언제부터 아제개그가 되었군요. 이렇게 늙어가나 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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