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 (Christmas In August , 1998)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바람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동안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즐거운 편지>



쌀쌀한 날씨에 비까지 내리니까 멜로 영화가 보고 싶어서, 고민 끝에 <8월의 크리스마스> 를 골랐다. 좋고 싫음이 확실한 요즘 영화들에 비해 점잖은 매력이 있다. 교통계 여경 다림은 필름을 현상하러 들른 사진관에서 정원을 만난다. 아직은 세상의 많은 일이 즐겁고 신나는 20대 다림에게, 사진관 아저씨는 그다지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정원의 입장에서 다림은 맑고 곱고 순수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그만의 천사처럼 여겨진다. 그녀와 도란도란 일상을 공유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불현듯 불치병 선고를 받고마는데. 살아온 인생에 후회는 없지만, 다림을 두고 떠나야 하는게 못내 아쉽다.



정원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간직하는 방식은, 참으로 그답게, 조용하고 예의있다. 아무런 강요도 표현도 없이, 다림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자신의 이야기로 그녀의 마음이 얼룩지지 않도록 담담히 주변 정리를 마친다. 한편 다림은 고민이 많다. 언제나 너그럽게 웃으며 속 편하게 만들어주는 정원이 싫지 않아서, 이 감정이 애정의 시작인 것 같아서 설레고 떨린다. 꼬박꼬박 아저씨라고 부르면서도 자꾸만 근황을 살피게 된다. 종내는 한자한자 꾹꾹 눌러쓴 편지를 사진관 문틈으로 밀어넣지만, 곧 후회를 하고 만다. 안으로 밀어 들어갈지 말지 망설이던 편지가 안쪽으로 행방을 정했을 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병원에서 오랜만에 돌아온 정원은 어찌어찌 그 편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영화는 그 내용을 읽어주지 않는다. 울음을 삼키는 정원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영정 사진을 찍는 모습까지는 덤덤하게 잘 봤는데, 나중에 다림이 사진관 안에 걸린 자기 사진을 발견하고 씨익 웃고갈 때부터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상대방의 마음이 편안하도록, 자기 자신을 조용한 추억으로 만들어버린 한 사람의 배려가, 그 안에 담긴 따듯한 사랑이 절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원은 편지를 부쳤을까, 부치지 않았을까. 잘은 모르지만, 부쳤더라도 별다른 이야기를 쓰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그것이 정원이 생각하는 최고의 사랑법이기에.



다림 역 심은하의 단아하고 풋풋한 매력이 곧게 뻗어나간 영화다. 과한 화장 없이, 뽀얗게 여물은 그녀의 볼따구와 웃음이 싱그럽다. 경찰 제복을 입은 모습이 아주 잘 어울려서, 고등학교 때 남자들 깨나 울렷겠다 싶었다. 딱히 자극적인 내용도 아니면서, 잔잔하게 마음을 두드리는건 <러브레터> 와 참 많이 닮았다. 한석규가 직접 부른 ost 를 들으며, 명대사를 떠올려본다.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습니다. 사랑을 간직한채 떠날수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정원은 다림만큼, 어쩌면 훨씬 더 행복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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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심은하와 함께 이십대를 보낸 사람으로서
      참, 고맙고 아쉬운 배우입니다.

    • 지금은 정치가의 아내로서 뉴스에서나마 아주 간간히 등장하던데, 여전히 맑고 깨끗하고 예쁘더라고요. 썰전이었던가, 어떤 종편 방송을 통해 심은하 이야기를 잠깐 본 적이 있는데 실제로 브라운관에서 활동한건 6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고 놀랐어요. 청초한 이미지를 간직한채, 은막의 스타가 되어 사라진 느낌이랄까요. 가장 이상적인 (?) 형태의 연기생활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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