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냉면3부작 】 냉면과 막국수


냉면과 막국수 사이

중학생 때의 일이다. 집 근처 오랫동안 영업하던 고깃집이 망하고, 새롭게 냉면 전문점이 문을 열었다. 갈빗집 후식으로나 먹던 음식이 어엿한 대표 메뉴가 된다는 점을 신기하게 여겨 찾아갔는데, 질기기만 하고 맛이 하나도 없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친구들에게 주말에 씹고 온 질긴 냉면담을 꺼냈더니, 듣던 한명이 '그렇게 질길 리가 있냐' 며 말꼬리를 잡았다. 자존심 빼면 시체인 15살.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뭣보다 그 녀석의 잘 끊어지는 냉면 이야기는 완전히 헛소리로 들렸다. 어쩌면 사내놈이 저리 뻔뻔하게 거짓말을 할까.


시간이 한참 흘러서야 세상에는 평양냉면이라는 것이 있고, 그 면발이 쉬이 끊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지금도 연락을 하는 그 친구놈은, 내 염장을 지르고 싶을 때 <우래옥> 가서 냉면이나 한사발 하자고 샐샐거린다. 대략 굴욕과 수치심으로 점철된 기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꺼이 평양냉면을 먹는다. 목구멍으로 황급히 '넘기는 데에' 바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멋진 냉면이 있는가 하면, 도중에 반 이상 남기고 일어설만큼 비린 집도 경험해가면서. 헌데, 이런 냉면을 먹을 때마다 나를 줄기차게 괴롭혀온 의문이 있다.



바로, 냉면과 막국수의 차이가 뭐냐는 점이다. 그게 그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텐데, 확실히 다르다. 예를 들어 <을지면옥> 은 냉면이다. <우래옥> 도 틀림없이 냉면이다. 그런데 <장원막국수> 정도에 이르면 머리가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정갈하기는 냉면 뺨치는데, 막국수란 말이지. 둘을 가르는 명확한 기준이 없기도 하지만, 실상 둘을 꼭 갈라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다만 보편적으로는 막국수보다 냉면을 고급음식으로 쳐준다. 그러니까 꼭 곰탕과 설렁탕의 관계 정도다. 설명을 하려면 잠깐 조선시대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메밀과 밀에 관하여

어느 겨울날, 뒤주가 텅 빈걸 발견한 산골 아낙은 적당히 까부숴둔 메밀이나 먹어야겠다고 결심한다. 온 가족이 합심하여 맷돌을 굴리면 껍다구가 더러 섞여 거친 가루들이 나왔을 것이고, 그런것을 억지로 물에 갠 다음, 바삐 반죽을 만들었을 것이다. 제대로 뭉쳐지는 녀석이 아니니, 뽑는 동시에 면발을 만드는 '착면' 형태가 되어야 한다. 구멍 뚫린 바가지에 대고 묽은 반죽을 있는 힘껏 밀어넣으면, 삐져나온 메밀들이 간신히 가닥의 형태를 갖추고 소나기처럼 우수수- 끓는 솥으로 떨어졌으리라. 고깃국물 육수 같은건 어림없는 소리다.


운이 좋아 뛰놀던 장끼라도 한마리 잡았다면 모를까. 아이를 시켜 커단 바가지를 쥐어주곤 뒷마당 구석쟁이에 묻어둔 동치미나 재까닥 퍼오라고 했겠지. 그렇게 살얼음 동동 낀 '올갱이국수'. 그게 아마 막국수의 시초가 아니었을까 상상한다. 오랫동안 공들인 밀국시가 아니라, 막(바로) 만들어 먹는 국시. 이전 편에 잠시 설명했는데 전세계적으로 빵, 국수, 만두 등은 '사치식, 미식' 에 속한다. 다량의 노동력이 필요한 제분을 거쳐야만 이런 음식을 만들어낼 '곡물가루' 가 생겼기 때문이다. 반면 메밀은 서민의 곁에 상주한 서민을 위한 곡물이었다.



경작이나 제분에 있어서 쉽고, 맛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글루텐을 지니고 발효하며 변화하는 밀의 '맛' 을 따라가기엔 부족했다. 반가 조리서는 밀가루를 육수에 풀어내는 것만으로도 귀한 '소스' 인 양 기록했다. 한국보다 밀재배에 적합한 기후를 가진 중국에서조차 제분 기술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밀음식이 귀했다. 서긍은 <고려도경> 에서 "나라 안의 밀이 적어 상인들이 모두 경동도에서 들여오기에 면 값이 대단히 비싸서 큰 잔치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 고 적었다. 경동도는 송나라 변경에서부터 산동성, 하남성까지의 지역을 일컫는다.


새로운 냉면을 원한다, 나는.

정리하자면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중국 수입산 밀가루 음식' 을 갈망했다는 뜻이다. <고려사> 에는 '제례 때 면을 쓰고, 절에서 국수를 만들어 팔았다' 는 내용이 있다. 의식 때의 면은 미리 만들어둔 '밀면' 이었을테고, 절에서 만들어 판 국수는 '메밀면' 이었으리라 추정한다. 이 정도까지 확인했으면 거진 게임 끝이다. 냉면과 막국수가 각각 반가와 서민을 구분짓는 음식이었다면, 가장 큰 차이를 주는건 육수보다도 '면' 이었을 확률이 높다. 현대의 기준과는 다르게 밀가루 양이 메밀보다 많을수록 더 훌륭한 진골 냉면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이야기를 꺼낸 데에는 얼마간 '숨겨진 의도' 가 있다. 전통 음식이 우리가 알고 있는것과는 꽤 다르고, 맹목적으로 좋은 것이라 믿을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과거 우리 음식에 깃든 사회상과 영양학적 지혜를 알아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만 몇 세기가 흘러 과학적으로 발전한 지금도, 무조건적으로 전통을 답습하는 데에 빠져있으니 우려가 된다. 음식은 시대를 담는다. 순면 백프로, 높은 메밀함량만을 무조건 '전통있다, 격식있다' 라고 밀어붙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슴슴한 육수, 메밀 100퍼센트는 요즘에 새롭게 생겨난 기준이다.


예전 음식의 복기에만 머무르지 말고, 뭔가 다른 메밀면을 한번 만들어내볼 때도 됐다. 국수는 다들 비슷하게 훌륭한 수준으로 뽑아낼 수 있으니, 육수나 고명, 식감에 있어 변주를 주면 좋을텐데. 적절한 수준의 '현대적 냉면' 을 만들어내는 곳이 2017년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그저 슬퍼한다. '진주 교방음식을 재현한 냉면' 이라든가, 해산물이며 고기에 나물까지 일단 섞고나서 고민하는 '비빔냉면' 말고. 인간의 오감을 자극할 수 있는 그런 냉면. 한그릇에 만오천원이라도 기꺼운, 조리와 접객에 있어 부단한 고민을 거친, 그런 냉면을 먹고싶다.


김준근 作 국수 누르는 모양. 줄을 잡고 사다리에 다리를 뻗대며 체중으로 있는 힘껏 눌러 국수를 뽑았다. 장정이 필요한 노동이었기 때문에 오죽하면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3대가 있어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이란 소리도 있었다.


역사 속 냉면 이야기

앞서서 신나게 두들겨 팼으니, 이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냉면의 역사를 한번 거들떠보자. 국내 문헌에 냉면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17세기 초다. 우의정을 지낸 장유 선생이 <계곡집> 이라는 시문집을 지었다. 그 안에 대놓고 '냉면 요놈 맛있어 죽겠다' 고 예찬하는 '자장냉면' 이라는 시가 있다. 자장면이 아닙니다. "자줏빛 육수는 노을빛처럼 비치고, 옥색의 가루가 눈꽃처럼 흩어진다. 젓가락을 입에 넣으니 그 맛이 입속에서 살아나고, 옷을 더 입어야 할 정도로 그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뚫는다." 라고 민망할만큼 찬사를 퍼붓는다.


원각사지 10층 석탑의 정경을 그렸다. 유득공, 박제가, 이덕무가 이 근처에 살며 교류해 '백탑파' 로 불리게 된다.


우리에게 한층 익숙한 느낌의 냉면은 18세기 전후에서야 등장한다. <발해고> 의 지은이로 유명한 유득공이 1773년, 박지원 이덕무와 함께 개성과 평양 등지를 유람하고 돌아와 '서경잡절 西京雜絶' 이라는 시집을 남겼다. 전부를 해석할 깜냥이 안되니, 중요한 부분만 발췌하자면 그 중에 냉면증돈가시등 冷麵蒸豚價始騰 냉면 때문에 돼지 수육 값이 막 오른다, 는 내용이 있다. 음력 4월의 풍속을 노래한 내용이니까, 날씨가 무더워질 무렵에 냉면의 인기가 대중적으로 치솟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때부터 냉면+수육 조합이 존재했다니 놀랍다.


그림 작가 미상. 정약용이 시를 써 넣은 산수도. 아마 이런 곳에서 노루고기와 냉면을 자셨겠지.


서른여섯 때, 곡산부사로 부임한 정약용 선생도 냉면을 드셨다. 서흥도호부사 임성윤에게 초겨울에 맛있는 식사를 대접받고 시를 남기셨다. 입양온요녹련홍 笠樣溫銚鹿臠紅 납조냉면숭저벽 拉條冷麪菘菹碧 삿갓 모양 따듯한 냄비의 저민 노루고기는 붉은데, 손으로 틀어낸 냉면의 절임배추는 푸르구나. '납조' 부분을 두고 곁가지를 꺾었다거나, 손으로 뽑았다거나, 사리를 틀어낸 모습이라는 둥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가지런한 냉면이 나오는 것만은 틀림없다. 물론 도호부사 정도 급이니까, 노루고기 전골에 냉면을 곁들였을 것이다.



문관 이유원 <임하필기> 에는 11살의 어린 순조 (1800년) 임금님의 기싸움이 담겨있다. 달구경을 하다가 문득 야참이 먹고 싶어져 냉면을 가져오너라 명을 내렸다. 숙수들이 모두 귀가했을 시간이라 시종들이 궐 밖 음식점으로 가서 냉면을 테이크아웃 해온다. 헌데 순조가 매의 눈으로, 서있는 이들 중 한명이 들고 있는 '물건' 을 발견한다. 얼른 풀어보라 명하여 드러난 정체가 돼지고기 수육이다. 괘씸하기 짝이 없다. '쟤는 지가 먹을 것을 따로 사왔으니, 냉면 절대 주지말라' 고 한다. 이 얼마나 열한살다운 토라짐인가.


1802년, 평안도로 유배를 떠난 이인행도 <신야선생문집> 서천록 편에 기록을 남겼다. 토속희끽냉면 土俗喜喫冷麵 개교맥소성 蓋蕎麥所成 이위침저장조지 而以沈菹醬調之 수심동빙운지교 雖深冬冰雲之交 장철이위쾌 長啜以爲快 냉면을 즐기는 것이 이 지방 풍습이다. 교맥(메밀) 으로 국수를 만들고, 김치 국물로 맛을 조절한다. 추운 겨울에 먹어도 들이키면 시원하다. 라는 6월경의 일기다. 당시는 음력을 썼을테니, 지금으로 치면 대략 7-8월 무렵의 이야기다. 여름에 냉면 한그릇을 대접 받으면서, 겨울 냉면의 매력까지 꼼꼼히 기록했다.



냉면 모양에 대한 묘사가 확연히 드러난 기록으로는,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 (1809년) 를 참고하면 된다. 장 담그는 법을 소개한 '장사의' 편을 보면, 동치미 조리법이 나온다. 말미에는 넌지시 냉면 이야기도 덧붙었다. '동치미 국물에 가느다란 국수를 넣고 무, 오이, 배 , 유자를 같이 저며 얹고 돼지고기와 계란 지진 것을 채 쳐서 넣고 후추와 잣을 뿌리면 이른바 냉면이다' 란다. 고깃국물이 들어가지 않았을 뿐이지, 요즘 나오는 냉면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어딘가의 음식점이 아닌 반가 조리법을 다룬 책이라서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면백의 <대연유고> 에도 냉면 이야기가 등장한다. 평양을 둘러보며 지은 기성잡시 箕城雜詩 (1826년) 를 보면, 냉면빙입홍로열 冷麵氷入紅露熱 얼음 넣은 냉면에 뜨끈한 홍로주, 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미 평안도에서는 냉면이 술과 곁들여 술술 넘기는 기막힌 '안주' 였나보다. 문신 유주목 역시 돌아가신 아버지 (좌의정을 지낸 유후조) 가 매월 초하룻날, 최승지 집에 가서 냉면을 선물로 드렸다, 고 기록한다. 백성들이 냉면을 얼마나 즐겼을지 의문이지만, '선물'이 될 정도의 음식이라면 마냥 흔하지는 않았으리라.



홍석모의 세시풍속집 <동국세시기> (1849년) 역시 빼놓을 수 없다. 用蕎麥麵沈菁菹菘菹和猪肉名曰冷麵, 又和雜菜梨栗牛猪切肉油, 醬於麵名曰骨董麵, 關西之麵最良. 냉면은 메밀국수를 무절임과 배추절임에 말고 돼지고기를 썰어넣은 것이다. 잡채와 배, 밤, 쇠고기, 돼지고기를 썰어놓고, 기름장을 쳐서 메밀국수에 비빈 것은 골동면이라 한다. 냉면은 관서 지방이 최고다. 즉, 이 때부터 개성과 평양 냉면은 유명했고, 비빔냉면 (고추장은 쓰지 않지만) 종류도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냉면은 왕실 연회에도 등장할만큼 인기가 치솟는다.


무신년진찬도병 중 통명전헌종회작


순조비의 육순 축하잔치가 열린 헌종 14년 (1848년) 의 <진연의궤> 와 경복궁 재건 축하연이 열린 고종 10년 (1873년) 의 <진작의궤> 에는 재료와 분량이 자세하게 쓰여있다. 헌종 때에는 메밀면을 동치미 국물에 말고 양지머리 편육과 돼지사태 편육, 배추김치, 배, 꿀, 잣 등을 넣었다. 몹시 달달한 맛이 연상된다. 고종은 헌종보다는 덜 달게 먹었다. 메밀사리는 대한문 바깥 국수집에서 공수했다. 재료에 고춧가루가 추가 되었으며, 꿀은 사라지고 배의 양도 줄었다. 고기 구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을 왕실에서도, 동치미를 육수로 썼다.


쌀 한되에 35전, 맥주가 35전이던 시기였다. 인천 짜장면은 10전을, 냉면은 조금 더 비싼 15전을 받았다.


배달의 원조

이윽고 1891년, 왕실과 관청에 그릇을 납품하는 공납업자 지규식의 저서 <하재일기> 를 보면, 여름용 옷감인 항라 1필에 30냥, 냉면은 한그릇에 1냥 이라고 적혀 있다. 냉면 그릇을 주문받았다거나 더러 지인 집에 초대를 받아 '별식 냉면' 대접받은 이야기도 써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공납업자가 양반 계층은 아니므로, 냉면이 여러 계층에 열려있는 외식이 되었음을 인증한다. 인기는 날이 갈수록 거세진다. 1924년 <개벽>의 기사를 보면, 한그릇에 15전 하는 냉면으로 일수입 300원의 매상을 올린 가게가 생긴다. 하루에 2000그릇을 판 셈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우르르 음식점에 몰려가 먹었던 것은 아니다. 순조 임금님이 냉면을 테이크아웃 시켰듯, 양반님네 또한 음식을 집에서 받아먹고자 했다. 우리는 100년 전부터 배달의 민족(?)인지라, 일찍이 냉면전문 배달부인 '중머리' 가 있을 정도였다. 1926년 1월 6일자 동아일보에는 냉면 배달부 16명이 파업한 기사가 실린다. 일급 60전을 1원으로 올려달라는 요구였는데, 4일 후에는 협상에 성공해 무사히 파업을 종료한다. 하지만 인상폭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3년 후인 1929년에 무려 10배 규모로 불어난 160명이 파업을 선언한다. 



이번에는 업주들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전원 해고를 통보한다. 불똥은 '냉면없이 못 사는 손님들' 에게 튀었다. 민심이 들끓자 결국 평양경찰서장이 나서서 사건을 중재한다. 1935년에 평양냉면 한그릇의 가격은 25전이 되었고, 배달비로는 10전 정도가 주어졌다. 배달은 새벽 두시까지 이어졌는데, 세숫대야만큼 커다란 그릇을 한번에 여러 개씩 날라야 했다. 중머리들은 자전거를 타고 묘기를 부리듯 냉면 배달을 나갔다. 한번에 81그릇을 배달한 기록이 남아있기도 하다. 냉면 그릇이 지금처럼 크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하얀 갈게발이라는 것이 요 사진에 보이는 저런 것이지요 :)


아지노모토와 무쇠 제면기

평양에서는 겨울 냉면을 사랑하였지만, 경성에서는 여름 냉면을 반겼다. '랭면집의 광고하는 갈게발이 벌써 춘풍에 펄펄 날리었다' 는 동아일보 기사 (1921년) 가 눈에 띈다. 서로 다른 지역이니, 냉면 먹는 시기가 다를 수 있다 하겠지만 여기에는 합리적인 설명이 존재한다. 아지노모토의 시대가 찾아온 덕분이다. 1908년 이케다 기쿠나에 박사가 개발한 화학조미료는, 일본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다가, 1910년부터 국내로 수입된다. 서울의 쓰지모토 상점과 부산의 복영상회가 특약점이 되었다. 화학조미료는 곧바로 고기육수를 대체한다.



사실 근대 냉면의 역사는 조미료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1951년 발간된 <아지노모토 연혁사> 를 보면, 평양에서 냉면집 32곳이 단결해 '면미회 麵味會' 만든 이야기가 나온다. 이 때를 기점으로 각 도시에서 아예 냉면집을 묶어 '아지노모토회' 가 만들어지는데, 1936년-37년에 이르러서는 전국적인 소매상 네트워크가 생겨난다. 30년대 라면 일반적인 성인남성의 월급이 평균 30원이던 시절이다. 아지노모토는 다양한 크기로 팔렸는데, 가장 작은 '小' 자가 1원 30전이었다. 만만한 가격은 아니지만, 가게 입장에서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오른쪽 사진이 1936 년 8월 12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광고다. 양념가루 가지고 '여자의 수치' 까지 운운하다니!


고기를 대량으로 우려내는 수고로움을 줄일 수 있다. 특히나 동치미를 주로 쓰는 업장에서 대장균의 위험을 피해 고깃국물로 갈아타는 데에 큰 유인책이 된다. 안그래도 경성은 평양보다 위도가 낮아 동치미보다 고깃국물을 선호했는데, 겸사겸사 잘된 셈이다 생각하였을 것이다. 동치미 맛은 집집마다 다르니, 현존한다면 고기육수보다 훨씬 더 다채로운 냉면을 맛볼 수 있었을텐데, 고기육수로 통일된 현재의 상황은 조금 아쉽다. 1932년에는 김규홍 씨가, 재래식보다 세배 빠른 속도로 면발을 뽑아낼 수 있는 무쇠 제면 기계를 발명한다.


김 서린 부엌에서 온 장정이 땀에 쩐채로 면 뽑던 시기를 지나 '왜 이제 나왔느냐' 며 마구 칭찬하는 기사가 연일 일간지를 장식한다. 메밀반죽 역시 쫄깃한 식감을 더하기 위해 감자전분이나 고구마 전분이 섞이는 식으로 변화를 겪는다. PL480 조가 발효되며 싼값으로 구하기 쉬워진 밀가루는, 한반도의 면식 문화에 불을 당겼고 이윽고 함흥냉면의 시대가 찾아와다가 다시금 '평양냉면' 시대로 넘어온다. 영화 속에서 '재떨이로 얼굴 맞기 싫으면 함흥냉면 대신 평양냉면 먹으라' 는 대사가 나올 정도인, 바로 지금, 이 순간. 냉면은, 돌고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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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3

    • 왕왕 꿀동님의 이곳을 조용히 훔쳐만 보다가 이렇게 한줄 남깁니다. 내용만 봐도, 거의 준 논문급 수준으로 냉면에 대한 애정이 어느정도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직업상 외국에 장기파견 중인데, 밤마다 침샘을 자극하기도 하는 홈페이지입니다. (으악- 동치미) 하지만 고품질의 사진보다도꿀동님의 글재주가 더 자극제입니다.
      찰진 랭면 면발처럼 끊기지 않고 쭉쭉- 읽히는 글솜씨가 정말로 부럽기만 하네요. 바라기만 하면서 책을 멀리한 제 자신을 많이 반성하게되는 홈페이지 입니다.
      잘 보고있습니다. 더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 사실 냉면에 대한 애정이 엄청나게 깊은 것은 아닙니다만. 주위에서 자꾸 정확히 쓰라고 압박을 주는 분들이 많아져서요.내가 기자도 아니고 작가도 아니고 그냥 아마추어 블로거일 뿐인데, 대충 쓰면 안되겠냐 - 고 했다가 실컷 욕 먹었습니다. 되도록 정확히 쓰려고 노력했고, 원전의 경우 한문이나 언문을 직접 찾아가면서 읽어보았습니다. 덕분에 포스팅 하나 쓰는데 시간이 꽤 걸렸네요.

      장기파견 중이시라니 얼마나 오래 되셨나요 ㅎㅎ 다른 나라 음식도 어찌어찌 먹을 수 있지마는, 역시나 어느 순간 딱 '김치' 나 '된장찌개' 같은 한국음식들이 툭하고 땡기는 순간이 오죠. 어렸을 때 먹는 음식의 '인' 이 몸 어딘가에 몰래 박혀있나봐요. 책이야 많이 읽는 것은 하등 쓸모가 없고, 한권을 붙잡고 혼자서 얼마나 씨름하고 생각해봤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것 같습니다. 저는 오히려 독서량이 줄었네요 (자기 합리화중 ㅎㅎㅎ)

      며칠새 날이 더워져서 아주 난리도 아닙니다. 자전거 타러 갈 때마다 생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D 어디 계신지 모르지만 건강하게 지내셔요! 응원 감사합니다.

    • 오오 유익 하내요

    • 프로필사진 초별록별꿍꾸이

      2016.05.23 10:02 신고

      잘 읽었습니다.
      궁금한 것은 위의 <멧돌의 눈> 삽화 출처가 어디인지 심히 궁금합니다.

    • 일단 위의 사진은 김상보 선생님의 논문에서 찾은 그림입니다. 저의 냉면 이야기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깊이있는 한식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ㅠㅠ 논문 말고 책도 몇권 쓰셨으니 관심 있으실 경우 찾아보시면 될것 같습니다. 사실 기억이 확실치 않긴 한데, 하인리히 에두아르드 야콥의 <빵의 역사> 라는 책에서도 한번 봤던것 같습니다. 이 책 역시 몹시 좋은 책입니다.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은 책이라 절판 여부는 모릅니다만, 빵을 다루다보니 자연스럽게 밀과 제분의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D 이 책 안에도 같은 그림이 있을거에요 (아마!)

    • 이거 뭐 소논문 수준이네요 ㅎㅎ 저도 냉면집 탐방기 준비 중인데, 좋은 글 읽고 갑니다. 방이동 봉피양같은 경우는 국물보단 순면 주문 시 곁들이 편육이 더 인상적이더군요~

    • 몇 곳 다시 돌아다니고 있는데, 어떻게 매년 악화가 되는지 -_-;; 이유를 알 수가 없네요 ㅎㅎㅎ

    • 냉면은 특히 좋아하는 음식이라 즐겁게 읽었습니다.
      저도 나름 1년간 30여군데 댕기면서 직접 맛본 것을 기록해 두었습니다만, 글들이 워낙 두서가 없어 `엮어` 두지는 못했군요. 살짝 부끄러운 일입니다=ㅂ=).
      이런저런 좋고나쁜 잡다한 문헌을 보긴 했습니다만 제대로 다 모아둔 글은 이게 거의 최초라 너무 반갑군요. 감사히 잘 사려두겠습니다.

      고종의 냉면에 대해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이른바 `고종냉면`의 레시피는 대개 배가 흠뻑 들고(거의 한그릇에 반개는 들 것 같더군요), 거기다 제가 가진 고종의 이미지는 식혜나 사이다 등을 좋아하고 (개인적으로)약간 소갈이 있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단것을 탐하는 쪽이었습니다. 그래서 냉면도 꽤 달지 않았으려나 싶었어요. 그래서 고종냉면이 의외로 덜 달다는 말씀에 대한 레시피 또는 출전이 어떻게 되는지를 가르쳐 주시믄 감사하겠습니다.

      좋아하는 음식이라 그럭저럭 수도권을 돌고 나서 느낀 점은 결국 `평양냉면` 이라는 것이 잡을 수 없는 일종의 허상에 가깝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음식만큼이나 냉면도 본시부터 제법 다양한 데다, 서울 등 이남으로 유입된 건 개중 극히 일부이고 이것이 다시 시대에 맞추어 변해 왔는지라, 결국은 `취향에 맞추어 그냥 이게 냉면이다 하고 먹을 수밖에 없더라`라는 유아적인 결론만 내리게 되더라고요^^);;;. 거기까지 닿는 데도 제법 걸리기야 했습니다만.
      그러기에 줄기를 잡아보는 이런 글은 더 소중하겠지요. 솔직히 이 글은 기고를 권하고 싶습니다ㅎㅎ.


      서글픈 이야기를 덧붙여야겠습니다.
      안동에 있는 문제의 `건진국시`가게, 슬슬 더워지는지라 시동 걸려고 수소문을 했습니다.
      전화번호가 어디에도 안 보이는지라 꼼수 써서 근방에 있는 복덕방[...] 등에 스리슬쩍 문의를 해 보았지요.
      그런데 `요새 안 하시는 것 같던데......`라는 말을 듣고야 말았어요llorz.
      워낙 안 알려진 가게고 올해 초까지만 해도 다녀왔다는 기록이 있던지라 그래두 안심...아니 방심하고 있었는데, 진작 다녀왔어야 한다는 짙은 후회만이 남을 판입니다=ㅅ=).
      괜히 바람 불어넣어 놓고 김새는 결과부터 알려드리게 되어 면목이 매우 없다는 말씀밖에 드릴 게 없네요-_ㅠ).
      보얗고 보들보들하면서도 뻣뻣해 보이는 그 국수가락, 꼭 머금고 싶었는데...

    • 아무래도 한국사를 전문적으로 들입다 파는게 아니다보니 여기저기 있는 걸 모아두는 데에 그쳤습니다. 알면서도 못쓴 부분이 두어개 더 있고, 나머지는 다른 분들이 맡아서 해주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고종은 현대 병력으로 말하자면 당뇨가 있지 않을까, 라고 달달한 음식을 좋아하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드신 냉면도 분명히 달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진연의궤> 때 들어간 배의 분량을 보니 <진작의궤> 를 한참 상회하더라고요. 거기다 꿀까지 들어갔으니 이전에 궁에서는 냉면을 훨씬 더 달게 먹었던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서 그리 썼습니다. '상대적으로' 덜 달게 먹은 것이고, 요즘 생각하는 냉면보다는 '많이' 달 것입니다 :)

      저 역시 평양냉면을 먹어보며 신기루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깃국물과 발효야채육수를 섞어냈다' 정도의 고정된 틀은 있을 수 있겠으나, 맛은 다 달랐을 것입니다. 가가호호마다의 막걸리 맛과 김치 맛이 모두 다른 것 처럼요. 지금은 너무나 정형화된 맛이 판을 쳐서, 각 집마다의 개성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냉면집들 김치들은 왜 그리도 천편일률적으로 맛이 없던지요. 김치를 보면 동치미 각이 나오는데, 참 아쉬운 일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궁궐 음식을 '스탠다드한 기준' 으로 점찍는데요, 당시의 냉면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달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재밌기만 합니다. 예전에 한번 <우래옥> 이 msg 를 넣었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무진장 욕을 먹고 그랬었지요? 알고보면 msg 역사와 현대 냉면 역사가 함께 발전한 셈인데, 뭐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않나 싶습니다. 물론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을 무작정 방관하는게 좋은 역사의식은 아니라고 보지만요.

      그렇군요. 그래도 가봐야 아는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잠깐 해보긴 했습니다만. 조금 더 기다려보지요. 여름엔 또 국수를 말고 싶어지실 수도 있으시니 ^^...

    • 비밀댓글입니다

    • 냉면 뿐만 아니라 모든 음식이 그렇지 싶어요 ㅋㅋㅋㅋㅋㅋ 계속해서 변하는데 굳이 원형을 찾아 회귀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면에서는 좋은 온고지신을 고집하는 용재형 이야기가 마땅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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