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 빌보드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 2017)


어린 시절부터 인간관계가 참 버거웠었다. 많은 시간을 들여 감정을, 물건을, 이익을 주고받으면서 자연스레 무르익는 '관계'. 그러나 바라지 않았던 무겁고 자잘한 것들 역시 줄줄이 딸려오는 점이 싫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실망의 순간이다. 내가 베푼 것만큼 상대방이 내게 베풀지 않았다는 감정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 따져 묻고 싶은 순간들. 그럴 때면 아예 관계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좋지 않았겠냐는, 얄팍한 수만 떠올렸다. 내가 상처를 받았듯, 나 또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로.



<쓰리 빌보드> 라는 작품은, 상처와 인간관계 그리고 치유에 관해 이야기하는 블랙코미디다. 영화의 도입부는, 딸이 강간살해된 다음 지역의 광고판 3개를 구매하는 밀드레드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그녀는 광고판업자가 쉽게 거절하기 어려운 거금을 내놓으면서, 경찰서장과 경찰들을 질타하는 도발적인 문구를 싣는다. 내 딸이 강간당하고 죽어갔지만, 사건은 해결되지 않았고, 서장은 뭘 하고 있었냐는 통렬한 비판. 비록 지역 사람들만이 다니는 국도이지만, 작은 마을인만큼 파장은 일파만파 커져, 서장은 직접 그녀를 찾아나선다.



관객은 주인공의 강렬한 분노로 미루어 윌러비 소장의 인간성을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제복을 갖춰입고 밀드레드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그는 말기 췌장암을 겪으면서 나름대로 건실하게 자기 삶을 꾸리는 인간이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왜 그렇게 분노했나? 사실 그녀의 공격성은 19년간 결혼생활을 함께한 남편에게서 받은 영향이며, 딸이 외출하는 날 '강간이나 당할 것' 이라고 악담을 퍼붓고 만 '자신' 에 대한 분노다. 범인을 알 수 없기에, 그 분노는 지역경찰에게로, 누군가 책임을 질 수 있는 인간에게로 향했고, 소장이 당첨된 것이다.



물론 지역경찰들 역시 실제로 문제점을 안고있다. 특히 '유색인종' 에 대해 극렬한 거부감을 보이며, 사소한 실수도 죄로 만든 다음 유치장에 불러들여 취조하는 마마보이 딕슨이 그 예다. 경찰과 피해자 부모의 대립. 각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첨예하게 부딪히는 상황은 어떻게 흘러갈까? 우습지만 사랑과 용서다. 가장 먼저 소장이 사랑을 보여준다. 그는 가족들과 좋은 하루를 보내고, 투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자살한다는 유서를 남긴다. 한편으로 다음달 광고비 500만원을 선납하며, 밀드레드에게 편지를 쓴다.



아무 증거가 없는 사건이어서 범인을 잡기 어려웠다고, 시간이 지나서 범인이 자신의 죄를 떠벌리는 경우도 있으니 희망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자신에게 가졌던 여러 불만에 대해 이해하고 사과한다고. 힘내라고. 그리고 한편으로 딕슨에게도 '너는 언젠가 좋은 경찰이 될 수 있을 것' 이라며 격려하는 일을 잃지 않는다. 딕슨은 소장의 죽음을 알고 광고판업주의 사무실에 찾아가 난동을 부리고, 광고판에 불을 지른다. 밀드레드 역시 경찰서를 방화하는 것으로 맞불을 놓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경찰서에 숨어들었던 딕슨이 화상을 입고 만다.



이대로라면 극렬한 갈등이 예상되지만, 전남편의 실없는 애인이 건넨' 분노가 분노를 더 크게 낳는다' 는 말이 상황을 조금씩 정리해주기 시작한다. 딕슨은 (미필적 고의긴해도) 자신에게 불을 놓은 밀드레드를 이해하고, 범인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밀드레드 역시 세상과 자신에 대한 분노를 조금씩 가라앉힌다. 그리고 결국 둘은 합심하여, 용의자를 추적하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를 처단하는 것이 옳을까?' 라는 딕슨의 질문에 '가면서 생각해보자' 고 담담히 대답하는 밀드레드의 대답. 단호한 확언이 아니라 한결 관용적인 태도다.



우리는 많은 상황에서, 불가항력적인 일들이 벌어질 때, '내 탓이 아니야' 라고 생각하고 타인에게 그 책임을 전가한다. 죄책감을 강렬한 분노로 뒤집어 발산하면 속이 시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끝에 영그는 것은 더 커져버린 증오다. 일본에는 '남을 저주하면 무덤이 두개' 라는 말이 있다. 하나는 저주를 받은 사람이고, 하나는 저주를 한 자신의 것이라는 뜻이다. 영화는 얼마든지 시니컬한 결말을 만들 수 있었다. 용의자를 불태우는 쪽이 관객의 카타르시스를 불질하는 데에는 더더욱 좋은 방법이었을 테다. 하지만 그렇게 끝내지 않았다.



용의자는 죄가 입증되지 않은 사람이고, 밀드레드와 딕슨에게도 분노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해결' 을 볼 수도 있다는 '여지' 를  남겨놓기 위해서다. 드러내놓지 않고 담담하게, 빼먹지 않고 조그마한 위트까지 섞어 고통스러운 내용을 끌고나간다는 것이 아마도 이 영화를 블랙코미디답게 만드는 요소일 것이다. <프라미스드 랜드><미스 페티그루의 어느 특별한 하루> 에서 인상깊었던 프란시스 맥도맨드가 강력한 연기를 펼쳤다. 우디 해럴슨과 샘 록웰 역시 절묘한 캐스팅이었다. <겟아웃> 에 각본상을 빼앗긴 것이 유감일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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