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옥 】 강남구 역삼동


작년에 사랑니 세 개를 단번에 뽑아낸 직후의 일이다. 씹기 쉽되 뜨겁지 않은 음식이 필요했는데 냉면이 떠올랐고, 오랜만에 <우래옥>을 찾아갔었다. 이십여분 기다려 자리를 얻었고, 다시 또 십분 쯤 기다려 받아든 소중한 냉면. 조심조심 젓가락을 들어 몇개의 가닥을 우겨넣다가 문득 알게 되었다. 더 이상 올 수 없겠구나, 라고. 살아있는 것은 모두 노쇠한다. 늙어가는 테를 지우려고 노력하는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있을 뿐. <우래옥> 은 후자였다. 언젠가 맛의 최정점의 찍은 이후로 느릿하지만 점진적으로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반쯤 먹다가 밑바닥에 깔린 면수를 보니, 그래도 부어 전부쳐되 될만한 탁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실 새로운 냉면집들이 <우래옥> 출신 면장을 초빙하였다고 앞다투어 광고하는 걸 생각해보자. 반대로 <우래옥> 에서는 면장을 한명 잃은 것이 아니겠는가. 맛이 좋게 유지될 리 없으니 추억 속에 묻어둘 요량이었는데, 바깥으로 나간 사람 중 한 명이 역삼에 새로이 <평양옥> 이라는 냉면집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스러지는 쪽이 있으면 차오르는 쪽도 있는 법. 새 가게는 차오르는 가게려나 호기심이 생겼다. 순메밀 백퍼센트의 냉면이 9,000원. 아무리 그래도 강남땅인데 어떻게 가능한 가격인가 싶었는데, 몽골산 메밀을 쓴단다.


가게 한 가운데서 열일하고 계신 제분기.


메밀의 고향은 서늘하고 척박한 북쪽의 고원지대로 알려져있다. 매년 심각하게 따듯해지는 국내보다는, 원산지 메밀들 중 품질을 꼼꼼히 따져 골라오는 쪽이 낫다는 얘기다. 주인은 거피한 국외산 메밀을 자신있게 들여왔고, 그때그때 제분하기로 각오를 다졌다. 덕분에 메밀 철이 끝나버린 지금 먹어도 대단히 강렬한 메밀향을 즐길 수 있다. 정확히는 목구멍으로 면발이 우수수 빨려들어갈 때, 식도 안에서부터 비강으로 구수한 향이 퍼져나간다. 다소간 투박하면서 찰짐도 보전한 면발이다. 이만하면 냉면보다 막국수로 불러야 할 음식인데.


전적으로 내 취향이지만, 하는 김에 배도 빼버렸으면 싶다. 삶은 달걀 반쪽에는 황이 없었다. 요것도 맘에 듬.


여기서 한 방 먹은 것이, 육수다. 달달함이 배제된 고깃국물에 적절한 간간함. <정인면옥> 이나 <능라> 의 초창기가 떠오른다고 말씀하신 분들이 계셨는데, 개인적으로는 <우래옥> 이나 <서북면옥> 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 여긴다. 특히 향미가 강렬한 오이, 파를 배제하였는데, 국물과 면만으로도 네놈의 혀를 묶어둘 수 있다는 무언의 자신감이 돋보인다. 수육 역시 훌륭하다. 냉면 굵기만치로 얄팍함을 살려 썰었기에, 씹기 쉬우며 보드랍고 촉촉하다. 익지 않은 열무김치와 얼마간 익힌 무김치 역시, 냉면집들 중에서 상위권에 들 솜씨다. 


식탁 위 소금이 새하얀 정제염이 아니다. 이 소금 때문에 육수 맛이 더 좋은가 갸웃해 봄.


여러 문제들이 터져나오고 있는 정파 <능라도> 의 장기 집권에 대항하여 사파 출신 <피양옥> 이 슬금슬금 세력을 꾸리고 있는 가운데, 느닷없이 마계의 은둔 고수 <평양옥> 이 등장하여 강호무림을 평정했다는 뭐 대충 그런 이야기다. 앞으로 입소문이 나기까지 한달 여 간은 이 맛이 유지되리라고 보니 평냉성애자들은 어서 빨리 찾아가보시고, 그 밖의 메뉴들은 검증하지 못한 관계로 말을 아끼지만 냉면만 못하다는 소문이 있다. 다음에 나는 국물이랑 면이랑 따로 달라고 해볼 요량인데, <삼군리 메밀촌> 같은 맛이 나줄지 기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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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STUS/★★ 다른 글

댓글 5

    • 일요일에 바로 가려 했지만 휴무로 실패......ㅠㅠ)......
      분당 댕겨오는 길에 들러 보았습니다.

      면을 헹굴 때 물떨기가 덜 되었는지 다소 축축한 점이나 면수의 온도가 일정하지 않은 점 등으로 볼 때 오너가 아직 업장통제 내지는 관리를 제대로 하지는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럼에도 우래옥과는 완전히 다른 냉면이 나온 건 꽤 재미있는 점이라 생각합니다.
      한 때 냉면계에서 호사가들이 하던 말들 중 하나가 `우래옥 순면을 을지면옥 육수에 말아보면 어떨까` 같은 이야기였거든요.
      방향은 다르지만 우래옥도 다른 어떤 냉면집 스타일이라 하기도 힘든 이 냉면은 꽤 재미있게 여겨집니다.
      특히 무짠지가 아주 맘에 들었고 말이지요. 정말 취향이더군요.

      총평해 보면, 꽤나 재미있는 냉면입니다.
      더하기보다는, 빼기를 써서 만든 것 같았어요.
      투박해 보이지만 실은 아주 영리한 음식이고요.

    • 멀리 분당까지 걸음하셨었군요. 맞아요. 사람들이 없을 때의 면은 꽤 괜찮았는데, 다시 가서 먹어보니 조금씩 틀어지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한데 뭉쳐서 엉겨붙은 면이 나온다던가. 순메밀 백프로의 한계일지 모르겠지만, 전분끼가 국물을 온통 흐려놓기도 하고요. (뭘 더 섞은것 같기도 한데...)

      처음에는 고기육향이 굉장히 강한 국물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을지면옥 국물처럼 변해가고 있습니다. 맑은 빛깔 우래옥? 을 지향하는것 같아요. 무짠지는.. 아니 이것도 요상한 것이 점점 달아지고 있어요. 설탕 양이 조금만 줄었으면 좋겠는데 (는 저의 취향이지만요 ㅎㅎ) 조금씩 계속해서 테스트를 하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한 줄이 인상깊습니다. 영리한 음식이지요.

    • 비밀댓글입니다

    • 엊그제 다시 다녀왔는데 메밀향은 조금 줄어들었습니다. 철을 타나? 라는 생각도 조금 들었습니다. 향으로 치면 저어기 방배 양양메밀국수가 좀 더 나은것 같습니다. 100퍼센트 국산 메밀 썰에 관해서 다른 분들도 질문이 한참 많으셨습니다. 왜냐면 모 블로그에서는 '미국산' 메밀 이라는 이야기가 등장하고, 제 블로그에선 '몽골산' 이랬다가, 또 어떤 분은 '국산' 이라고 하셔서요.

      이 부분이 여쭤보고 싶어서 다시 쪼르르 달려갔었는데, 첫 2주 간은 국산메밀로 만드시다가, 현재는 몽골산으로 한다시네요. eye님과 저는 어떤 대체 메밀을 먹은걸까요 (..)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만 문득 궁금해지는군요. 아마도 사람이 많아지면 지금보다는 약간 더 하향평준화 될것 같습니다. 맛이 아니라 서비스 부분의 공백이 좀 있어요.

      모쪼록 메밀에 관한 의문이 풀리셨기를 바랍니다 :)

    •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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