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타 (Pieta , 2012)

  

김기덕 감독 영화를 극장에서 본게 참 오랜만이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의 쾌거를 이룬 덕분에 상영관이 늘어나서 편한 시간대에 관람했다. '예술성과 상업성은 공존할 수 없다' 던 감독이 이제는 그것을 넘어서는가 싶어서 반은 기쁘고 반은 우울했다. 하필 김기덕스러움이 가장 옅다고 느낀 작품이 수상작으로 선정될 줄이야. 대중의 편견에 맞서가면서 더욱더 대차지는게 김기덕 스타일이었는데 이번에는 곧은 뚝심이 한풀 꺾였다. 한층 나긋나긋한 자세로 다수의 '눈높이' 에 맞춘 작품을 만들어냈다. 해석의 여지를 넉넉히 남겨두었지만 아무래도 예전만큼의 강렬함은 없다. 감독님은 과연 만족하셨을까?

 

 

강도라는 이름

어려서 버려졌으니, 그것이 제 스스로 붙인 이름인지, 타인이 명명해준 이름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나 어쨌든 묘하게 삿된 이름이다. 강도. 그는 이름처럼 타인의 삶을 약탈하고 난도질하는 채권추심원이다. 하루에 한명 분의 단란함을 차곡차곡 '강탈하는' 존재.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불에 타죽을 놈, 갈가리 찢어죽이고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 이란 욕을 일상처럼 집어먹는다. 헌데 정말로 그는 '악마' 일까. 누가 그를 악마로 만들었는가. 누가 그 악마를 먹여살리는가. 그는 '순수한 악' 이다. 강도는 다른 삶을 배울 기회가 없었고, 살 기회도 없었다. 허면 알고도 종용하는 쪽이 훨씬 더 음습한 악마가 아니겠는가.

 

  

삶과 죽음, 그리고 돈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확신할 수 없다. 언제나 죽음의 공포를 껴안고 산다. 폭력과 죽음과 늘 함께인 강도는 역설적으로 남들보다 몇배나 강렬한 두려움을 곱씹으며 살아간다. 먹지않으면 먹힌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끊임없이 먼저 압도하려 든다. 날것을 먹어치우는 기벽의 답이 여기에 있다. 강도의 두려움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가장 크게 드러난다. 자살한 채무자를 두고 책임감이 없다고 책망하는 부분을 보자. 돈을 못 받아내서 화가 났다기 보다는 스스로 생명을 포기한 자에 대한 울분이다. '누구나 치열하게 다른이의 생명을 먹고 사는데, 니깟게 뭐라고 감히 편하게 죽어?'


  

어머니

'피에타' 는 본래 어머니가 아들에게 바라는 '자비' 였는지도 모른다. 냉장고에 묻어둔 친아들을 위해 구밀복검하는 여자. 세상의 모든 이가 손가락질 해도 그 비난을 막아서며 "우리 아들한테 함부로 말하지 마." 란다. 관객 역시 강도처럼 그녀에게 홀려든다. 선물이라며 던져줬다가, 다시 산산토막낸 장어를 생각해보자. 강도가 처음으로 장어를 보며 가졌던 애착은 가련할만큼 순식간에 난도질당한다. 토끼 역시 마찬가지다. 민수에 의해 바깥으로 내쳐져 차에 치이고 만다. 정말 그 토끼를 살려보낼 생각이었을까. 일단 풀어주고 (잔뜩 희망을 주고) 살해하는 모습이 후반부와 복선처럼 맞물리며 꽤 의미심장하다. 

 

  

산전수전 다 겪었을 강도가 흔해빠진 '모성애' 전략에 당하는 것은 어이없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 라는 명제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에서는 문득 <마더>의 김혜자가 떠오른다. 맹목적인 믿음은 순수해서 더욱 무섭다. 악마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악마의 어머니가 되어야했던 그녀의 고백은, 결국 선으로의 회귀라서 참으로 인간답다. 그녀는 죽을 때 누구의 어머니였을까. 대단하다고 봐야하는 쪽은 어머니일까, 그 여자일까. 아들을 죽인 자마저도 용서하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성모 마리아에 비견되는 조민수 인지도 모르겠다 (이 해석에 크게 공감은 안 가지만) 

 

  

피에타의 의미

영화를 보면서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대체 누구에 어떤 자비를 구하는걸까? 였다. 처음엔 감독이 관객에게 강도를 이해해 달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헌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강도는 뼛속부터 악한 캐릭터라기엔 무리가 있다. 시대나 환경이 악을 '종용'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만들어진 악일 뿐이다. 결말부분에 조용히 트럭 아래로 들어가는 강도의 자살은 그래서 조금 애틋하다. 인간에 대한 실망과 희망이 몇 번이나 교차되는 그 아이러니한 과정을 전달하면서, "인간이 현대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신이시여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가 정작 말하려던 말이 아닐런지 조심스레 추정해본다.

  

  

종교적인 이야기를 좀 해보자면. 하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좌우에 함께 자리잡은 범죄자들이 바로 강도를 저지른 놈들이다. 그런데 주인공 이름이 강도다. 흥미로운 공통점이다. 둘. 헌데 강도의 행동은 서서히 함께 매달렸던 '예수'에 가까워진다. 살점을 떼어서 어머니께 권하는 장면은 유월절 성찬식을 떠올리게 했고, 얌전히 발목을 묶어 죽음을 자처하는 엔딩에서는 예수의 죽음이 떠올랐다. 강도는 예수였을까? 조민수가 구원하고자 하는 것은 강도인가, 세상인가? 오히려 강도를 인간답게 감화시키고 떠났으니 이는 어머니의 위대함과 천주교의 위엄을 설파한 반전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 사실, 밀양과 마더, 친절한 금자씨, 카운트다운 등 모성애 영화를 조금씩 섞어낸 느낌이라 감동은 덜하다. 다만 대중과의 소통력을 높였으니 감독 나름대로 큰 양보를 한 셈. 이전 작품들에 비해 충분히 소화 가능한 수위임은 두말할 것도 없고, 공감대의 폭도 커지지 않을까 싶다. 다만 '김기덕스러움' 은 산으로 간 듯. 난해한 장면들을 놓고 대중들이 다양한 담론을 벌이는 과정이 부재해서 아쉽다. 아마 비슷한 리뷰가 줄줄이 쏟아질듯. 내가 김기덕 감독 작품을 빠짐없이 감상한 것은 아니니까 할 말 없지만, 15살에 처음 관람했던 <빈 집> 을 뛰어넘는 강렬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렸을 때 봐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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