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피로해져가는 연애


어차피 부딪혀야 할거라면 되도록 잘 싸우고 싶었다. 한국에 들어오기 두달 전부터 드문드문 희미해지던 연락은 한국에 들어와서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고, 크고 작은 일들로 만나는 시간은 슬금슬금 미뤄져서 벌써 이주나 지났다. 10개월도 기다렸으니 고작 며칠이야 뭐가 힘들까 싶었지만, 같은 한국땅 아래에 있으면서도 못만난다고 생각하니 심리적으로 엄청난 거부감이 든다. 남자친구는 나를 못 만나는게 아니고 안 만나고 싶은게 아닐까. 지금 대는 이야기들은 뻔한 핑계가 아닐까. 떳떳하다면 만날 날을 괜히 미룰리가 없겠지. 하는 쓸데없는 의심들만 솟아난다. 그래서 그런 오해를 한시라도 풀고싶은 마음에 무례한 일인줄 알면서도 집 근처로 찾아갔다.

 

  

사실 남자친구 집은 우리집에서 편도로 1시간 30분이 소요되는 거리다. 놀랍게도 작년 이맘때의 우리는 그 거리를 참 꾸준히 오갔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니까 귀찮다거나 힘들다는 생각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했다. 만날지 못만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을 위해 예쁘게 치장을 하고, 그 사람의 집근처 카페에 가서 무작정 연락을 기다린다. 주위에서는 이보다 비합리적일 수 없다며 놀려댔지만, 이 정도쯤이야 기꺼이 해낼 수 있다 여겼다. 시간이 흘러 이맘 때를 추억하며 '어쩜그리 바보같았었냐' 후회할지 모르지만, 이윽고 깔깔 웃으면서 '그래도 순수했었지' 라고 덧붙일 수 있을것 같으니까 꾹 참았다. 아무것도 재지않고, 해보고 싶은대로 다하는 내 방식.

 

  

첫번째 찾아간 날은 남자친구가 병중이라 들었고, 두번째 찾아간 날은 집안 행사가 있댔다. 그리고 세번째인 오늘은 정말로 매운소리를 들었다. 그냥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확실히 남의 집앞까지 찾아가 다짜고짜 불러내는 행동은 무례하다. 그래도 연인 사이인데, 아직 헤어지자 어쩌자 말도하지 않은 상황이니까 5분 정도라도 얼굴을 보여줄거라 믿었다. 그런데 그 사람 입장에서는 아니었나보다. 정말로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단순히 마주대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뭐가됐든 이 남자는 나를 만나지 않겠다는 거부의사를 분명히 전달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순간, 뭣도 모르고 참 설레하면서 기다리고 행복해하던 내가 몹시 부끄러워졌다.

  

  

연애라는건 부끄러움을 몰라야 순탄하다. 그런데 한쪽이 '저기, 이건 좀 터무니 없잖아, 비상식적이잖아' 라고 현실적인 자세를 갖추기 시작하면, 다른 쪽도 급작스럽게 머쓱해져서 그만두고 싶어진다. 나는 초라해졌고, 섭섭해졌고, 속상해졌다.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아니겠지, 아닐거야 라고 생각하던 마음이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다. 할만큼 했다. 나를 필요로 해달라고, 나를 우선해달라고, 이야기라도 좀 나눠보자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부탁한 셈이니까 이제 나머지는 저쪽의 손에 달렸다. 이런 것으로 연락하는 자체가 내게도 힘들고, 그 사람에게도 부담이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구슬을 잘못 꿴 것일까.

  


며칠 전 어머니께서 밥을 먹다말고 내게 아주 예의바른 목소리로, 궁금한게 있다고 남자친구가 한국에 돌아왔냐 물어보신다.  그렇다고 말씀드렸더니, 만약 그 아이가 한국에 돌아와서 먼저 찾아오지 않는다면 이 연애는 끝내는게 좋겠다고 네가 너무 가엾다고 하신다. 사실 너무나 지쳤다. 그래도 끄트머리의 끄트머리까지 지속하고 있는건 단 한가지, 인간적인 신뢰를 저버릴 사람은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일이, 그이에게 정말로 급작스럽게 닥쳐서 어쩔 수 없었다는 얄팍한 해명이 듣고 싶은거다. 사실 어떤 이유라도 좋다. 그게 다시 시작하자는 이야기든 끝내자는 이야기든 확실한 선이면 된다. 그걸 보여주지 않고서 자꾸만 보류상태로 끌기 때문에, 연애의 피로가 극에 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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