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 겨울밤 남의 연애 상담


취향이 달라 걱정하는 A양

이 시간에 전화할 리 없는 친구가 문득 연락을 해와서 오랫동안 전화통을 붙잡았다. 애인이랑 갈수록 어긋나는 기분이 든단다. 처음에는 자기한테 많이 맞춰주는게 좋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공통점이 드문것 같아 실망스럽단다. 어떤 이야기를 했을 때 예상과 전혀 다른 반응이 나와서 당황스럽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좋은 소재와 환상적인 핏에 가격까지 보장되는 옷을 기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귄지 오래되지 않은 사이라길래 일단 천천히 느긋하게 가보라고 격려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니까 다름을 맞춰가려고 노력하느냐,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찾느냐는 선택하기 나름이다. 내 경우 진행중인 연애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편이고, 지나간 연애에 대해서 쫑알거리는 편도 아니다. 아무데서나 털어놓기엔 하나하나 다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좋은 추억이든 다툰 추억이든 그 과정이 있어서 지금의 내가 있다. 



연애를 하면서 얻게된 가장 큰 교훈은 '진솔함' 이다. 누구나 연인에게는 솔직하다. 다만 농담수치 조정장치를 지닌 타스처럼, 인간 각자도 솔직함의 퍼센트를 조정한다. 선택은 자유다. 물론 처음부터 대단한 거짓말로 사기를 치고 시작하는 사람은 드물다. 좋아하는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으니까, 은근슬쩍 자기 의견을 숨기고 동조하는데 사소한 배려에서부터 '거짓' 이 시작된다. 장기적으로 보면 약이 아니라 독이 된다. 내가 아니라, 그 사람 기준에 틀어박힌 나를 발견하게 된다. 반복되면 더이상 버텨낼 수 없는 순간이 닥치고 이별 통보를 하기에 이른다. 그럴 바에야 죽이되든 밥이되든 처음부터 자기 의견을 분명하게 말하는 쪽이 낫다. 당장은 안 맞는다 싶고 어색하기도 하겠지. 이십몇년을 따로 산 사람들이 일란성 쌍둥이도 아니고, 보자마자 착착 죽 맞는게 더 이상하다. 요는 그 다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이해하고 계속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느냐다. 


처음부터 한번도 싸우지 않는 커플보다, 티격태격 하더라도 많이 대화해본 쪽의 유대감과 회복력이 훨씬 강력하다. 익숙해지고 편해지는 단계 전까지 계속해서 전전긍긍이지만, 그래도 주눅들거나 외롭지 않은건, 진심으로 전력을 다하는 모든 이들이 나처럼 힘들고 또 그만큼 행복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엇갈리는 일은 풀어나가면 된다. 잘 안 풀려서, 마음은 아직 끝이 아닌데 억지로 위기를 맞는 때도 있을거다. 그때는 그냥, 이것저것 상상하지말고 상대방에게 묻자. 해볼만큼 해봤는데도 안되는건 어쩔 수 없다. 최선을 다하면 후회가 없고, 후회가 없으면 실패도 아니다. 그런걸보면 연애는 두둑한 뱃심이 필수다. 내 연인에게 사랑받는다는 확신, 자신이 그만큼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것만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면 무서울게 무언가. 다행히 우리는 아직 젊고, 연애관을 밀어붙여볼 시간을 가지고 있다. 당당해서 맘 편한 연애를 하길 바란다.



평범한 연애는 질린다는 B군

한번은 귀청소를 좋아하는 사람과 사귄 적이 있었다. 본인은 귀 파달라는 이야기를 부끄러운 요청인 것처럼 말했는데, 내게는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나 역시 마루에 볕이 들때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귀청소하는 시간의 즐거움을 익히 알고있어서였다. 전쟁같은 일상 중에 그만큼 평화로운 때가 또 언제 있겠는가. 그 행복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라 훨씬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내 귀를 남에게 공개하는건 서투르고 부끄러워서 못한다. 헌데 내가 남의 귀를 탐사하는 시간은 제법 보람차더라. 귀지는 더럽다기보다는 얼마간 앙증맞게 생겼다. 귀 바깥으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해 화석이 된 이야기 덩어리처럼 보인다. 켜켜이 쌓인 시간만큼 더 농밀해진 녀석들. 깜깜한 암굴에 숨죽이고 묻혀있기 때문에 유물 출토하는 고고학 박사의 손길로 접근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물묻은 면봉으로 마무리를 하고, 마지막으로 귓속을 후- 하고 불 때 발가락이 오그라드는 기분이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냐면, 연애하는 시간을 소중히 생각하란 뜻에서다. 굳이 대단한 뭔가가 아니라, 귀파기 같은 소박한 시간이라도 충분히 반짝반짝 빛날 수 있다. 일상에서 행복함을 느껴야지, 매일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하면 지치기 마련이다. 그러니 데이트 코스가 늘 똑같다고 투정부릴 필요가 없다. 그 나물에 그 밥은 자극적이진 않아도 오래도록 꾸준하다. 모르긴 몰라도, 너는 평생토록 이백편 이상의 영화를 보고 오만끼 이상의 밥을 먹을거다. 그 시간을 지금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 나누는 '중' 이다. 어차피 해야할일 이라면 '누구랑 같이한 덕분에 얼마나 행복했느냐' 에 신경쓰는게 현명하다. 서로간 같이 있는것 자체가 즐겁고 편안해야지. 권태기 어쩌구 변명할 생각 말아라. 정 심심하다 싶으면 네 쪽에서 먼저 새로운 계획을 짜서 짠! 보여주면 된다. 매번 자극적인 연애만 하다보니 심심하겠지. 그래도 조금 더 인내하도록.



성탄절호갱님 예정의 P오라버니

오랜만에 남자 동기였던 오라버니가 카톡으로 연락이 왔다. 크리스마스 때 여자친구 선물을 어떻게 해야할지 걱정이란다. 분위기 좋은데서 식사하라고 했더니,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란다. 예약을 아직 못한거냐고 물었더니, 무조건 선물을 해야한다고 고집을 부리는거다. 알고보니 동기들이 모두 고가의 선물 받는다며, 여자친구가 고가의 브랜드 모델넘버를 '정확하게 찍어서' 하명해주셨단다. 사실 이 오라버니는 갓 취직을 한 상태다. 집은 넉넉한 편으로 아는데, 본인 일을 스스로 헤쳐나가는 성격이라 학비와 용돈 등을 일절 본인의 손으로 해결해온 상태다. 현재는 학자금 갚느라 여윳돈이 부족한 상황인데, 여자친구는 AA 기업 연봉이 얼만데 그 정도도 못쓰냐는 식인가보다. 제손으로 그리 힘들게 번 돈이니 여자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매몰차게 차버릴줄 알았는데, 이 - 착하지만 정신나간 - 오라버니의 말이 더 가관이다. 


여자친구가 고른 백은 자기 기준에서 너무 비싼 편이라고, 백오십만원 정도 현금을 주면 어떨까 물어보더라. 듣다가 울화가 치밀어서 '니가 ATM 이냐 등신아' 라고 말해버렸다. 이 정도로 세게 말하면 깨닫는 바가 있을줄 알았는데, 혹시라도 잘 되어서 결혼이라도 하면 결국 부부 공동재산이니 손해가 아니라는 엄청난 해석을 내놓더라 (..) 평생 같이 살만한 사람은 돈을 '써달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아라, 아껴라' 고 말하는 사람이고, 연봉 운운 발언을 하는거보니 오라버니 월급을 제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뜻이며, 남에게 기죽기 싫어서 명품을 요구하는 부분은 과시욕 이라고, 그게 충족이 안될경우 차일거라고 설명했는데 이해를 한건지 부러 눈을 감고있는건지 모르겠다. 더 쫑알거릴까 했는데 아이고 의미없다. 남중 남고 공대 테크트리는 답이 없다. 그나저나 애인을 호갱으로 취급하는 여자친구분이여, 이게 정말 최선인가요?



열반 드실 기세의 모쏠 K군

주위에 더러 모태솔로가 있다. 여자보다는 남자인 친구들 비율이 더 높은데, 25.9살인 지금이면 한번쯤 '연애관' 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어보인다. 이성과 대화해본 경험이 적고 수줍음이 많은 성격 정도라면 문제없다. 비교적 쉽게 '틀'을 깰 수 있고, 상대방이 조금만 잡아당겨주면 언제 그랬냐는듯 빠르게 연애에 적응해간다. 정작 걱정해야될 사람은 따로있는데, 이성에게 요구하는 부분이 지나치게 까다로운 경우다. 아마도 무지에서 비롯되는 거겠지만, 이 부류의 사람들은 완벽한 짝을 찾는다. 어딘가에 자신과 합치되는 환상의 궁합이 있을거라고 굳건한 자기만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부딪혀봐야 허와 실을 알텐데, 성에 안찰 것 같은 점이 발견되는 순간 좋아함을 거둬버리니 어디에도 손댈 겨를이 없다. 설렘이라곤 모른채로 갈수록 홀로 고고해질 뿐이다. 그렇게 해가 갈수록 이상형은 완전하게 진화해버리고, 애인을 만날 확률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시간이 지난만큼 적당히 타협하지도 않으니 큰 문제다. 왜 이런 착각이 반복되어서 해마다 모태솔로 누적인원이 늘어가는걸까. 찰리 채플린 아저씨의 이야기를 참고할 만하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연애야말로 더없이 그렇다. 완벽해보였던 그/그녀의 헛점이 드러나고, 사소한 습관이나 취향이 다름을 알게된다. 하지만, 그게 진짜 연애, 아니 사랑이다. 상대방을 환상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진짜 애정'이 시작된다. 상대방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비로소 좁디좁은 나의 세계도 알아차릴 수 있다. 일시적으로 자존심이 상할 때도 있겠으나, 그것은 다시금 자기애로 돌아온다. 내 눈에 부족해보인 상대방. 그리고 상대방 눈에 보일 부족한 나 자신. 서로의 입장에서 역지사지를 경험하며 그 어느때보다 긴밀한 인간관계를 쌓아나간다. 


위험한건 위와같은 상황을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했든 연애를 시도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타인보다 나 자신이 한없이 소중해서 그대로 나르시즘 덩어리가 될 확률이 높다. 뒤늦게 시작해봤자 위태로운 연애를 하기 일쑤다. 어디서 들은 이야기는 많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맞추는걸 부끄러워하며, 상대방 떠보기에 급급하다. 지나고보면 아이고 의미없는 일들에 집착한다.타이밍이 어긋나도 파이팅 하면서 헤쳐나가는 '용기' 가 부족하다. 애초에 내가 다 하겠노라 마음먹고 저자세로 가면 편한데, 높은데서 상대방을 굽어보고  받기만 바라니 수월한 진행이 안된다. 상처받는게 두렵다고 연애를 그만두는건, 다칠지 모르니 평생 걷지않겠다는 선언과 같다. 뛰어다녀보고 엎어져도 보고 상처도 생겨보고 딱지와 굳은살까지 지나가면, 또 그렇게 되더라도 이겨낼 수 있음을 알게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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