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불탱이나 한번 더 보러갈까


우수한 사람 곁에서 알짱거리다보면 시야나 사고관이 더 넓어질거라 믿었다. 한발 앞서 나간 어른들을 늘 졸졸 따라다녔고, 똑똑한 사람이 좋았다. 배울것이 있는 연애, 나를 키우는 연애만이 값지다고 생각했다. 더 많이 알고, 더 포용력 있고, 더 단단할 것 같은 사람을 염원했다. 지나고보니 헛물을 켰다. 지식과 인간성이 비례하지 않듯이, 존경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더라. 존경이 아닌 '존중'을 찾았어야 했다. 나를 진심으로 존중해주고, 또 내가 진심으로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을. 나라는 인간은 학습능력이 어지간히 없는지, 한치도 틀림없는 패턴으로 다시한번 형편없이 깨지고 말았다. 연애를 하는 동안은 나무랄데없이 좋았다. 예의바르고 공과 사가 분명하고 매너가 좋다. 내 가치관을 돌아보게 만드는 발전적 충고도 서슴없이 던진다.



 그래서 모든게 잘 굴러가고 있구나 확신하는 시점에 돌연 연락이 끊겼다. 처음에는 '연락이 왜 안 되지?'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찬물을 뒤집어쓴 냥 정신이 들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전 날에 연락이 끊기다니. 마음이 수런수런하고, 어떻게 된 일인지도 잘 모르겠는 마당이라 혼자 현대미술관에 찾아갔다. 지하2층 한적한 공간에서 <통도사 석가여래 괘불탱> 을 발견했다. 보물인데다 워낙 커다란 작품이라 따로 암막을 친 공간에 전시해두었는데, 사람들이 잘 몰라서 들어가지를 않는다. 그래서 나혼자 이십여분간 완벽한 독대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성탄절에 탱화 조합이라니. 그런데 약발이 생각보다 강력해서 마음이 차분해졌다. 여래님과 눈을 맞추고 이것저것 시꺼먼 감정들을 쏟아냈다. 



이런 일들이야 도처에서 무시로 일어나는 일이겠지. 사랑이 식고 연애가 끝나고 다시 누군가에게 호감이 생기고 연애를 시작하고, 그 와중에 맞물리는 것도 떨어지는 것도 자연스럽다. 마음이 관여하는 문제를 이성적으로 판단하려는것 자체가 오진이다. 잘 알고있지만, 그래도 마음은 역시나 화가 난 채다. 책임감 없는 연애는 정말 싫다. 마무리를 어영부영 해두면 그쪽이나 나나 찜찜할게 뻔한데 연락이 끊어져서 증발하듯 헤어지는 이별이라니. 이미 1년 3개월간 마음고생 해본 전적도 있다. 겪고도 또 한번 당하는걸 보니 정말 바보같다. 속아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속이는 사람도 생기는 법인데. 인간은 쉽게 질리고 쉽게 유혹당한다. 대신 사람이니까 동물과는 다르게, 충분히 대화하고, 잘지내라 말끔하게 끝맺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기본 하나 지켜내는 일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결국 사람을 잘 몰라본 스스로에 대한 실망스러움이 가득찬다. 당신은 끝마무리를 흐지부지 했다는 점 하나 때문에, 그간의 신뢰를 모조리 잃었다. 나 한 사람에게 불신을 얻는다고 큰 차이야 없겠지만, 그런 마음가짐이 언젠가 다른 부분에서 불거져나와 자신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또 한가지. 상대방에게 뭔가를 요구할 때는, 당신 스스로도 지킬 수 있는 이야기, 신념에 입각한 이야기를 하길 바란다.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한편으로 별것 아닌 사람이었다. 이런 부당한 끝(?)을 볼 때마다 설렁설렁 연애하고 싶어지지만, 지금껏 내가 전력으로 부딪혀온 노력과 진심이 아까워서 참는다. 언젠가 그대가 말했듯 난 좀 더 소중한 대우를 받을 가치가 있으니까.


이미지 맵

EXPERIOR/연애 다른 글

댓글 5

    • 비밀댓글입니다

    • 비밀댓글입니다

    • 여기에는 탱화 이야기만 쓰느라요. 다른 방해가 없이 조용한 상태에서 집중해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참 좋았습니다. // 달빛도 좋았습니다. 정원 전 그림들의 대부분이 뭔가 되게 꽉 차있는 기분이었거든요. 소나무 그림이 하나 있었는데 화면을 뒤덮고 있는게 굉장히 답답해보였습니다. 꼭 여백의 미를 살릴 필요는 없겠지만, 정원의 개념은 보통 '숨' 을 틔워주려는 데 있으니까 이재삼 작가의 작품들처럼 뭔가 '덜 그릴수록' 좋았던것 같아요. 한 작품 아니고 몇개 있었는데 거의다 목탄화였던걸로 기억합니다. 가로로 이어붙인 측면에 새가 날고있는 (?) 작품도 좋았고, 세로로 이어붙인 화면 아랫녘에 사람이 짝다리를 짚고 서있는 (?) 작품도 좋았습니다. 부드럽고 아늑해서 맘이 편해지는 작품이었어요 // 매트릭스:수학_순수에의 동경과 심연도 생각보다 매우 즐겁게 봤고, 태양의도시2, 새벽의노래3 처럼 설치미술도 즐거웠습니다. 새벽의 노래는 보는 내내 <프로메테우스>다 싶더군요 ㅎㅎ 레안드로 에를리치 작품은 신기했습니다. 옆에서 인터뷰가 돌아가는데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더군요. 한진해운이 재밌는 짓을 하고있군 (!)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나저나 보리스는 굉장한 낭만가였군요. 흰 빛이 아주 하얘지지 않아도 됩니다. 불완전해도 괜찮아, 누르스름한 흰 빛이면 어때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네요 ^^ 뭐 근데 마음먹은대로 만나지는 것도 아니고, 만난다 해도 제맘대로 되는것도 아니고. 연애에 애시당초 기대를 하지 말아야 ㅎㅎㅎ

    • 비밀댓글입니다

    • 오랫동안 보고 관찰한 다음 사귄 사람이든, 그냥 '어어어' 하고 상대방 뜻에 넘어가 후다닥 사귀게된 사람이든, 연애의 길이나 깊이에 있어서 큰 상관이 없는것 같습니다. 저는 '왜 더 잘해주지 못했나' 라는 후회는 안합니다. 그때그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나고 나서 아쉬워하는 점은 없어요. 대신 허무해지죠. 내가 그토록 열심히 쏟았던 노력과 진심은 '헛거였나' 싶어서요. 사실 답은 알고있죠. 감정이란 퍼올리는대로 끌어올려지는거라서, 닳거나 없어지는게 아니라는걸요. 새 사람이 생기면, 또 그런 감정들이 차오를테고, 바닥없는 우물이라는걸 아지만 그래도 언젠가 말라버리면 어떡하지 미리 조바심을 치는것 뿐입니다. 순간의 공허함이 싫어서, 헛된 노력을 한것 같아서, 설렁설렁 연애해볼까 싶어지는거죠. 지금에 와선, 어떤 마음으로 연애를 시작하든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둘이 만들어가는거니까, 잘 맞으면 오래가고 아니면 금방 헤어지고 그렇게 되는거라고 봐요. 너무 운명론적인가요 ^^;;?

*

*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