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칵테일


어린 시절 영화에 보면, 으레 멋진 바에 앉은 남자들이 칵테일이며 위스키를 시켜댔다. 어쩐지 좋은 자리에서 마셔야할 한 잔 같았기에, 적당한 순간이 찾아올 때까지 첫 잔을 참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이전의 남자친구들이 술을 못 마시는 편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좋아해서 술을 마시러 가자 부추기는 부류들. 다만 그들은 술을 너무 신나고 즐겁게 마셨다. 내 생각에 칵테일이란 섬세하고 가냘퍼서 그 여림을 십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마셔야 할 술이었다. 그렇다고 아무 사람이나 덥썩 붙잡고 찾아갈 수는 없었기에 시간만 흘렀다. 아마도 칵테일을 마실 일은 영원히 없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렇게 확단하기 전에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났다. 

  

 

그날 따라 지인의 예식장에 다녀온터라 정장 차림이었고 거리는 북적거렸으며 배는 부르지도 고프지도 않았다. 결정적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에 푸른빛의 간판이 눈길을 잡아 끌었다. 피에르 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사이엔 자연히 거기 가야한다는 분위기가 솟아났다. 롯데호텔 35층. 야경이 보이는 창가에 나란히 앉아서 우리는 술을 기다렸다. 내가 술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그도 알았으므로, 선택은 자연히 그가 했다. 내 딴엔 '드디어 찾아온 칵테일' 이라는 생각이었으므로, 눈앞에 놓여지는 것이 압생트든 바카디든 토달지 않고 들이켰을 것이다. 하지만 내 앞에 놓여진 것은 초록빛도 황금색도 아닌 선연한 핑크빛 액체였다. 코스모폴리탄. 그게 칵테일의 이름이었다.

 

  

한손에 들었을때 기분좋게 찰랑거리는 중량과 공기중으로 사뿐사뿐 퍼져나가는 상큼한 과일향. 반지르르 매끄러운 유리에 입술을 마주대고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홀짝였더니, 순간의 청량함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상상으로 그렸던 맛보다도 훨씬 훌륭해서, 난 더이상 칵테일에 실망하지 않겠구나 기뻐하며 연거푸 꼴깍였다. 식도를 지난 알코올은 무던했던 뱃속을 한바탕 휘감고, 아랫척추에서부터 목덜미까지 여세를 몰아 열기를 밀어붙인다. 마침내 정수리에 도달한 짜릿함은 얼굴로 내려와 볼을 발갛에 물들이고, 다시 공기로, 가쁜 숨으로 변해 흩어져버렸다. 취기의 자취를 그토록 낱낱이 느낄 수 있는 술은 처음이었다. 커다란 장벽을 단숨에 뛰어넘은 기분이었다. 

 

  

그 황홀한 발견과 놀라움에 대해 설명하려고 옆자리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 사람이 보였다. 등받이에 기대어 간신히 꼿꼿함을 가장하고있는 내게, 슬며시 재킷을 걸쳐주고 얼음물을 권해주는 사람이. 남은 코스모폴리탄을 홀짝이는 동안 난 그의 넓은 어깨만 힐끔거렸고, 마지막 한모금이 사라질 즈음에야 불현듯 깨달았다. 이보다 더 특별한 한 잔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것이고, 난 아주 오랜시간 동안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임을. 아마도 그 사람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을 테다. 덕분에 우리는 연인이 되었고, 지금도 분위기 좋은 곳에서 칵테일을 마시러 다닌다. 하지만 역시 처음 마셔본 칵테일 같은 것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칵테일이니까. 



이미지 맵

EXPERIOR/연애 다른 글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