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야기하기 시작한 그는


그는 차를 좋아하고 속도내는 걸 좋아하는 남자다. 그래도 나를 태우면 거짓말처럼 규정속도의 80 퍼센트만 냈다. 무례하게 운전하는 사람들을 보면 살짝 나무라는듯이 혀를 쯧쯧 가볍게 찼다. 운전하는 동안 한손으로는 핸들을 다른 한손으로는 내 손을 잡아주었다. 따듯하고 두툼한 손이 포개지면 잘맞는 캐시미어 코트를 걸친 것처럼 아늑한 기분에 빠져들곤 했다. 운전에 집중하다가도 가끔씩 내 기분을 살펴주느라 눈을 맞춰주곤 했는데 그 찰나가 좋았다. 햇빛이 들면 에비에이터 스타일의 선글라스를 꺼내쓰곤 했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는 교통경찰관이라 볼 때마다 웃음이 터지곤 했다. 운전솜씨가 능숙해서 불안하게 느낀적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유턴은 날카롭게 해치웠고 그때마다 한팔로 내 상반신을 가로막아 단단히 고정시켜주었다. 그런데서 이상하리만치 섬세한 사람이었다. 



내가 사는 곳과 그가 사는 곳은 도시의 양 극단에 위치해 있었다. 매너가 좋은 사람이라서, 데이트 후에 집까지 바래다주는걸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차를 가져오지 않은것을 몇 번이나 아쉬워했다. 사람 부대끼는 일에 익숙치않아 지하철 타기를 싫어했지만 나를 위해 얌전히 감수해주었다. 손을 잡고 있다가 보는 눈이 적어지면 새들처럼 어깨에 머리를 가만히 파묻었다. 단단하고 넓직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으면 이세상 어디보다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키가 더 크거나 작았더라면 곤란했을텐데 서로에게 맞춤한 사이즈라 다행이었다. 너무 편안해서 서있다는것도 잊고 콜콜 잠에 빠질때도 있었다. 몇년 전처럼 탄탄한 몸매는 아니었어도, 통통한 베둘레햄이 귀여웠다.



처음 만났을 때, 예전 얼굴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대번에 알아차렸다. 호감을 주는 단단한 인상이다. 시원스레 뻗은 눈초리는 끄트머리가 살짝 쳐져서 유순한 느낌을 준다. 적당히 두터운 눈썹은 갈수록 위아래도 퍼지는 부채꼴이라 험상궂은 느낌을 상쇄시켜준다. 콧날은 보기드물게 단정했는데 붓으로 한일자를 내려그은듯 흔들림없는 직선이라서, 보기좋게 도톰한 콧망울과 근사한 조합을 이뤘다. 입술은 그의 얼굴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곡선을 그리는 부분이었다. 불쑥 들어간 인중에 비해 윗입술이 적당히 부풀어올랐다. 무표정할 때에도 입술 끄트머리가 살짝 말려올라가는 스타일이었다. 암갈색의 눈망울은 항시 장난끼로 반짝거렸고, 그 눈빛이 마치 소년같은 생기를 부여했다. 생각에 골똘이 잠길때면 깊숙한 눈빛을 했는데 어쩐지 쓸쓸해보이는 모습까지도 참 좋았다.



우리는 데이트하러 나갈 때 신경쓰고 나오는 커플이 아니었다. 중학생 때 까불까불하던 내 모습을 알고있는 사이라서 편안한 차림새로 만나곤 했다. 면티에 면바지 운동화 차림의 서로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다. 어떤 옷을 어떻게 입을까보다, 단정하고 청결한 매무새가 우선이라는데 의견을 모았다. 가끔씩 신경쓰는 옷차림은 신선한 자극이 되어 평범한 일상을 더욱 반짝거리게 만들었다. 우리는 유혹하고 싶은 날 멋지게 입었고, 바라는만큼 매혹 당했다. 나는 그의 챠콜그레이색 정장이 좋았고, 그는 그 색이 챠콜그레이라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내가 마음에 쏙 든다고 말해주었다. 화장한 얼굴도 좋지만 민낯으로 다니는게 더 어여쁘다 말해주는 사람이어서 안심할 수 있었다.



모든 일에 논리적인 성격이었다. 언쟁이 일어났을 때는 그냥 넘어가주는 법이 없었다. 뭐든지 근거를 대며 조목조목 짚어나가 항복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자잘한 걸 걸고 넘어지는건 아니어서 얄밉지가 않았다. 큰 그림을 그려 핵심을 짚었고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일은 언제나 순위를 매겨서 처리했다. 효율적인 방법을 통해 신속함을 확보하는 점에 늘 감탄했다. 카리스마가 있어보였지만, 내심은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누군가 부탁하면 거절하는 법이 드물었다. 주변사람들을 바지런히 챙기고 돌볼 줄 알았다. 아랫사람들에게는 넉넉하고 윗사람에게는 믿음직스러웠다. 겸손하고 예의바른 성격이 숨어있었다. 사귀는 동안 그걸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다.



미각은 섬세한 편이었지만, 내가 고른것이 무엇이든 찌푸리지 않고 먹어주는 쪽이었다. 뜨거운 것만 잘 못 먹었기 때문에 고양이 혀라고 놀려대곤 했다. 해외 생활이 오래라 식탁 매너 또한 훌륭한 편이었다. 음식을 천천히, 맛나고 품위있게 먹었는데 참 세련되어 보였다. 자기 양을 넘어갈 때에는 반드시 수저를 내려놨고, 절제를 아는 식욕이 맘에 들었다. 미국 들어가는날 급하게 만든다고 난리도 아닌 된죽을 만들어 갔다. 그래도 그걸 꾸역꾸역 먹어주었다. 나중에 내가 먹어보니 맛이 정말 별로라 속상하고 분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 한번 맛있는 죽을 끓여 그때 일을 물러야겠다고 별렀다. 죽 아니라 다른 것도 해주려고 열심히 요리를 배웠다. 이제는 부질없는 노력이지만.



자칭 헤비스모커지만 실제론 보통의 애연가였다. 같이 있는 동안은 되도록 담배를 참았다. 점심 때 만나서 헤어지기까지 딱 두개비 정도만을 피웠다. 오래 참은 후에 들이키는 한모금을 정말 맛있는 표정으로 음미해서 담배 맛이 궁금할 정도였다. 그는 내가 담배를 끊으라고 하지 않아서 좋다고 했다. 나는 담배 피우는 당신까지도 좋아하는거라고 맞받았다. 술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양주 한 병을 방안에 구비해두고 고단한 날에는 나이트캡으로 한 모금씩 들이킨다고 했다. 또한 애인이랑 술한잔 기울이는 시간이 더없이 평화롭고 온화할 수 있음을 알려준 사람이다. 처음 마셔본 코스모폴리탄은 그 사람하고만 마시는 메뉴가 됐다. 그 사람 생각이 나서 이제는 못 마신다.



미국에 처음 유학갔을 때 갑자기 바뀐 환경에 적응하려고 운동을 시작했다가, 선수가 되겠다고 마음먹을만큼 미식축구를 좋아하게 되었다. 지금은 그때 부상으로 허리가 아파 고생하지만 후회는커녕 정말 즐거운 추억이었노라 말하는 사람이었다. 한국에 들어오면 미국에 있는동안 방치했던 몸을 돌본다며 몰아서 운동하곤 했다. 굳건한 의지력이 부럽고도 좋았다. 시간이 흘러 내가 근력운동을 해보고서야 이게 말도 못하게 피곤한 일이라는걸 깨달았다. 그는 그 와중에 나와 매일 데이트를 하고, 매일 집에 바래다 주고, 한번도 내 앞에서 잠들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던 것들을 우연히 발견할때마다 잃어버린 퍼즐 조각들을 찾는 기분이 되버린다. 그런다고 해서 다시 맞출 수 있는건 아니지만.



혼자서 다 해낼 수 있다고 남들 짐까지 지는 사람이었다. 그런 어깨가 조금 쓸쓸해보여서 항상 맘에 걸렸었다. 씩씩한 여자친구가 되어 가끔은 쉴 수 있는 의지처가 되고 싶었다. 3개월 열심히 연애하고 9개월 공부하면서, 그렇게 몇년 지나면 관록있는 커플이 될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그 모든것이 끊어졌다. 증발해버렸다. 우리의 연애가 끝났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지난 여름의 나는 더없이 행복했었다. 그러니까 이 시점에, 당신이 왜 그랬는지 묻기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들을 떠올려 본다. 이를테면, 아무것도 묻지않고 당신 뜻대로 하는 것. 그토록 순수한 마음으로 연애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는 것. 시간이 한참 흐르고 언젠가 우리가 우연히 마주치게 될 날을 대비해, 당신이 나를 두고간 것이 미안해지는 미소를 연습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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