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점심 밥 좀 챙겨 먹어요


요즘 내 연애를 제대로 고민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3개월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평탄한 연애를 했기 때문이다. 일상 생활 속에 남자친구가 녹아들었다고 해야하나. 특별히 뭔가를 하진 않았지만 같이 지내는 시간이 충분히 즐거웠다. 그동안 나에게 연애란, 평범한 생활을 마비시킬 정도로 가장 절대적이고 우선적인 event 였는데, 지금은 그냥 나를 이뤄주는 일종의 foundation 처럼 여겨진다. 든든하고 안정적인 반석을 쌓은 기분이랄까. '따로 또 같이' 라는 말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사이고, 서로의 방식을 존중한다.



사실 이렇게 된 데에는 남자친구의 직업적인 특수성이 한 몫 했다. 왠만큼 힘들다고 생각하는 직군들을 다 만나봤는데, 그 중 에서도 단연 탑급이다. 맡은 일의 내용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회사에 나가있는 시간이 평균 17시간 정도 된다. 일하고 집에 들어와 기절했다가 세네시간쯤 자고 다시 일하러 나가는 그런 생활이 월화수목금 반복된다. 처음에는 남자친구가 날 놀리는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보니 진짜였다. 쉬는 날 가외로 일하는 것까지 합치면 주당 100시간을 달성하는 셈인데, 거진 산업혁명 당시와 다를바없는 노동 시간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평일은 얼굴보기가 힘들고, 주말 중 하루를 만난다. 주중이 조금 힘든 일정이었다면 만나는 시간의 절반 이상은 순수하게 잠 자는 시간으로 이뤄진다. 교외 데이트는 무리, 시내 데이트도 힘들다. 어딘가 다녀오면 그만큼 체력을 소모하게 되니까 대부분 집 근처에서 해결하려고 한다. 남자친구가 자고 있을때면 나는 빨래나 청소를 하고, 저녁에 찾아갈 음식점을 알아보고, 네비를 켜서 교통체증을 살핀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옆에 누워서 콜콜 같이 자거나 TV를 켜서 영화를 보거나, 혼자 뒹굴뒹굴 거리면서 놀고 있는다.



주위에서는 여자로서 매력 떨어지는 일이라며 말리지만, 나는 남자친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하나씩 늘어난다는 사실이 굉장히 기쁘다. 일례로 살면서 세탁기를 돌려본 일이 한번도 없었는데, 남자친구한테 배운 이후로 빨래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래봤자 세탁기가 다 해주는거지만 탈수된 빨래를 꺼낼 때의 향긋한 냄새를 맡거나, 가지런히 다 널었을 때는 뿌듯함이 굉장하다. 집에 없는 덕테이프라던가 (접착력은 3M 이 진리) 소매나 깃의 때를 한번 더 지우는 세제, 섬유유연제 (내가 좋아하는 향으로 고름) 등을 사 나르는 재미도 있다.



하기사 생각해보면, 남자친구가 이런 일을 해달라고 부탁한 적은 없다. 다만 내 성격상 깔끔한걸 좋아하고, 굳이 청소력으로 따진다면 비교 우위에 있는게 내 쪽이니까 기꺼이 한다. 그걸 남자친구가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리고 내가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친구들은 너를 그렇게까지 몰아간 (?) 남자친구의 매력이 무엇인가 굉장히 궁금해 하는데, 사실 매력이란건 사람마다 가중치를 두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에 몹시 주관적이지 않겠는가. 내 경우에는 아무래도 뇌가 섹시하냐의 여부가 중요하다.



아직도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한다. 약속 장소 근처에 가서 전화를 걸었는데, 창가 쪽에서 책을 읽고 있던 남자가 전화를 받으며 일어섰다. 첫인상은 산 속에서 조용히 수학해야할 양갓댁 도련님이라고 생각했다. 물정 모르게 생겨서 여자 말이라면 다 들어줄것처럼 보였으나, 그게 착각이라는 것은 고작 몇십분 후에 밝혀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했던 교육 사업이나, 한국 교육의 문제점, 나아갈 방향 등등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라는걸 알았고, 품은 꿈이 큰 사람이라는걸 알게 되면서 살금살금 좋아지기 시작했다.



돌고돌아 다시 만났을 때는 걱정도 앞섰다. 헤어졌다가 다시 사귀기까지 일년여 간의 공백기간 사이에, 남자친구는 소개팅을 수십번 받았고, 모조리 퇴짜를 놓으며 내 생각을 했단다. 참 기특한 부분이긴 한데, 내가 그럴만큼 메리트가 있는 인간인가 겁이 났다. 혼자 잘 놀고, 스트레스를 거의 안 받는 성격에, 사랑받는 가정에서 자랐고, 덜컥 베푸는걸 좋아한다. 다만 뼛속까지 한량 근성이라 게으름에 능숙하고 대충주의에, 돈 버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이런 성격을 가졌는데 남자친구와 잘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해서 만류했더니, 그가 말했다.



'내가 고민할 문제지, 네가 고민할 문제는 아니잖아? 내가 감수할 테니까, 넌 좋은지 싫은지만 말하면 돼.' ... 지금 와서 생각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의 박력에 홀딱 넘어가 버린듯한 생각도 든다. 지금 내 연애에는 '상대방 대신 죽어도 괜찮아!' 정도의 뜨거움은 부재하지만, 떠올리면 기분 좋아지는 따듯함이 있다. 곁에 있을 때 소중하게 대해주고 싶고, 옆에 없으면 뭔가 허전하고, 다른 뭔가를 하다가도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스트레스 받는 상황에서 떠올리면 배시시 웃게되고, 혹여라도 내 말이나 행동으로 상처받는걸 보면 어쩔 줄 모르겠다. 



좋아진 만큼, 겁도 많아진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고 싶으면서,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내가 있다. 이렇게 겁이 나고 어쩔줄 모르겠고 무서운게, 제대로 된 연애를 하고 있는 증거라 여기지만 그렇다고 두려움이 줄어드는건 아니다. 휘둘리고 싶지 않지만, 휘둘리는 나를 보면 경고음이 울린다. 소중한 사람이 생긴다는 것은 참 무서운 일이다. 그 사람은 나의 기쁨이자 약점이 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인간적인 존경심을 갖게하는 사람이어서 고맙고, 내 앞에 나타나줘서 참 고마운데, 딱 그만큼의 걱정도 꾸역꾸역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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