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더 소중해서 미안해


'뭔가 잘못 흘러가고 있어.' 라는 생각이 든지 한달이 흘렀다. 처음에는 정확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몰랐고, 눈치챈 다음엔 그냥 넘어가려고 애썼다. 종종 고민하는 시간을 제외한다면 충분히 평화로운 연애였기에, 지금의 상황을 새로운 방식으로 뜯어고치는 일이 몹시 귀찮아보였기에. 내 방식을 수정하고, 조금 더 양보하는걸로 쉬이 해결될 문제라고 여겼다. 그렇게 매 달의 마지막 날이 되면, 여전히 똑같은 부분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잠시 괴로워한 다음, 입을 꾹 다물고 웃음으로 때우는 전략를 취했다. 근본적인 해결이 없고서야, 더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할 때까지 그랬다.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어떤 식으로 어떤 말로 이 사람의 의견을 물어보는게 좋을까. 사소하지만 내겐 정말 중요한 부분인데, 남자친구와 사랑에 대한 가치관이 서로 달랐다. 상대방을 아무런 조건없이 수용하고 포용하는 것이 나의 사랑이었다면, 남자친구의 사랑에는 자격이 필요했다. 어떤 사람에게 남들보다 특히 높게 평가할 부분이 있기에 호감이 생기고 연애가 시작된다는 거다. 고로 어떤 이유로든 그 특성이 사라진다면, 예전과 똑같은 마음으로 좋아할 수는 없다는 거였다. 요컨대 내가 처음의 모습과 다르게 천방지축으로 굴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면 그이는 더없는 배신으로 느낄 터였다. 좋아한 모습이 사라졌으니.



연애 초창기에 150프로 실력발휘를 하는 나는, 무척 불안해졌다. 연애가 시작되던 작년 초는 남자친구가 새롭게 이직한 회사에서 고군분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다소간 힘들어하거나 징징대더라도, 그러려니 했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기에, 그이가 힘들어하지 않도록 최대한 서포트해줄 요량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정당한 배려였고, 애정 표현이었다. 1년이 넘는 연애 기간동안 나는 무던히 그이 쪽에 맞추고, 향하려고 애썼다. 서로간 하늘과 땅만큼 다른 성격을 지녔지만, 얼마간 포기하고 합의하는 과정을 거치며 그럭저럭 안정적인 궤도에 접어들 수 있었다. 그런데, 계속, 불안한거다.



내가 혹시나 자기중심적으로 굴거나 고집을 부린다면, 그 때에 이 남자는 반대로 나처럼, 나에게 맞춰주는 연애를 해줄 것인가. 좀처럼 안심하지 못하고 안절부절하는 이 때에, 마침 둘이 함께 풀어가야할 큰 숙제가 생겼다. 아니나 다를까. 상황은 내 의도와 정반대로 흘러갔다. 극단적으로 대립해보는 며칠동안 나는 처음으로 서로가 가진 가치관 차이를 실감했다. 앞으로도 우리가 줄곧 사귄다면 그래서 혹여라도 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할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 때에도 이 사람은 지금과 같겠구나. 절대로 굽혀주지 않으리라. 우리의 관계에서 계속해서 무엇을 포기해야하는 사람은 나겠구나.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까.



특이점은 불현듯 찾아왔다. 미래 언젠가에 내가 이이의 뜨거운 사랑을 한몸에 받게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내가 묵인해야할 상황, 고쳐야할 행동이 떠올랐다. 나이도 맘에 걸렸다. 내가 이십대 후반으로 달려가는 즈음이니, 여차하면 결혼을 고려해야할지 모른다. 그의 뜻에 맞춰 연애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한번도 자기자신을 굽히지 않는 사람과 평생 살아갈 자신은 없었다.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고, 결국 나도 있는 그대로 이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겠구나 직감했다. 헤어져야겠다고 마음먹은 이후에는 모든 것을 신속하게 결정했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게 가장 원만할지를 낑낑 고민했다. 



남자친구는 감이 좋은 편이었고, 나는 계속해서 알아채라고 이상하게 굴어댔다. 우리가 사귀기로 이야기를 나눴던, 그 바에 가자고 말을 꺼냈을 때, 그는 자연스레 눈치를 챘다고 한다. 덕분에 헤어지자던가, 그만하자던가. 구체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도 편하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 헤어지는 일은 어릴 때와는 사뭇 다르다. 가슴은 미어지고 눈물도 줄줄 쏟아지지만, 상황에 대한 수긍과 포기가 재빨라진다. 내 경우엔 후회마저 적다. 연애 기간 내내 최선을 다했다는 자신감이 있고, 충분히 심사숙고한 후에 내린 결정이어서다. 우리의 헤어짐이 어느 누구의 일방적인 잘못이 아니라는 점도 잘 안다.



한동안은 마음이 휑할 것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울리던 전화벨. 껴안으면 안심을 주는 그 편안한 가슴팍과, 약간 불만스러울 때의 눈빛, 머리아플 때 찡그리는 표정, 장난 치기 직전에 아이처럼 심술궂어지는 그 입매까지. 참 많은 것들이 내 마음 속 한켠에 조용히 잠들어 있다. 한번쯤은, 그때 그렇게 헤어지지 않았다면 하고 진탕 술을 마실지도 모르고. 습관 속에서 소소한 연애의 흔적들을 발견할 때마다, 그립고 애틋한 기분이 들거다. 아쉬운건 사실이다. 그래도 어쨌든 결말이 찾아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에게 상처가 될 관계를 너무도 잘 알기에. 더없이 평온한 순간에, 아무런 앙금이 없는 이 시기에 헤어지자 말했다.



많은 것을 함께 나누고, 겪었다. 불타오름과 설렘보다는, 편안함과 안정감이 주축이 된 연애였다. 다만 끝까지 서로가, 자신의 본질적인 가치관을 포기하지 못했다. 늘 주장해오던대로,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내 사랑이라면, 어째서 나는 내 남자친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헤어지는가. 결국, 사랑하지 않아서다. 좋아하지만, 내 스스로를 버리고 포기하면서까지 남자친구를 사랑하지 않기 떄문이다. 남자친구 역시 마찬가지다. 말로 표현을 잘 못했지만, 나를 참 많이 좋아했다고 한다. 늘 따듯하게 대해줘서, 항상 아낌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게해줘서, 자존감을 살려줘서, 맞춰줘서 많이 고맙단다.



남자친구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애인으로서의 장점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적으로 매력적인 모습들 말이다. 항시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말하며, 효율적으로 시간을 가용한다. 미래에 대한 설계나 대비가 거의 완벽하게 되어있고, 예상치 못한 난관이 닥쳐도 최선의 대처를 한다. 어쩌면 나는, 내가 가지지 않은 그런 모습들을 옆에서 지켜보는것으로 대리만족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직은 애인보다 스스로가 더 소중하기에, 상대방도 그런것을 알기에 미련이나 아쉬움은 접어두고 끝을 선택한다. 다음 번엔, 매순간 상대방을 사랑하고, 상대방에게도 그만큼의 뜨거움을 요구하는 치열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스스로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자. 내가 행복하고 즐거워야, 옆에 있는 사람도 보살피고 끌어안을 수가 있다. 그러다 어느순간 나보다 상대방이 더 소중해서 아무런 조건없이 마냥 섬길 수 있고, 섬김 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서로간 웃으면서 인사를 나눈 남자친구가, 앞으로 더더욱 성장하여 훌륭한 거목이 되길 바란다. 언젠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그이의 이름이 등장하면 '내가 예전에 잘 알던,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라고 기쁘게 재잘댈 수 있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사귀는 동안 즐겁고 행복했다. 내게 더 잘 어울리는 연애에 대한 관점도 얻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미지 맵

EXPERIOR/연애 다른 글

이전 글

다음 글